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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 '군함도'와 얽힌 뜻밖의 순간들
류승완 감독, '군함도'와 얽힌 뜻밖의 순간들
  • 미디어제주
  • 승인 2017.08.1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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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군함도'의 메가폰을 잡은 류승완 감독.

지옥보다 더 지독했다. 류승완 감독(44)은 우연히 마주하게 된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처참한 기분을 느꼈다. 지옥섬이라 불리는 군함도의 풍경과 그곳에 갇힌 사람들의 얼굴은 류 감독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들을 이곳에서 탈출시키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류 감독뿐만 아니라 모두가 느꼈을 부채의식. 그것이 영화 ‘군함도’이 시작점이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영화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남서쪽으로 18㎞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하시마 섬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군함의 모양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는 섬에 갇혀 온갖 폭력에 노출돼야 했던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한다는 상상력과 바람이 담긴 작품이다.

“고민이 많았어요. ‘군함도’를 다룬 첫 번째 영화니까요. 영화의 스타일을 좇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제 안의 태도가 더 중요했어요. 그건 준비하는 동안 더 확고해졌죠. ‘군함도’를 시작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는 조선인들이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해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지옥섬을 빠져나가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광복군인 박무영(송중기 분)이 탈출을 주도하지만 결국 이것이 실현되는 건 다리를 잃은 사람, 딸 가진 아버지, 여자들의 결심 덕분이거든요.”

이런 이유로 류 감독은 인물 실화를 따르는 방식 대신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보태기로 했다. 숱한 좌절감을 느꼈을 조선인들의 바람을 대신 이뤄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영화의 시작점이었던 만큼 류 감독은 “다시 영화를 만들더라도 선택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며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흑백으로 설정한 건 시대의 이미지를 담고 싶어서였어요. ‘군함도’의 문을 어떻게 열까 고민하다가 제가 받은 첫인상을 그대로 녹여내기로 했어요. ‘군함도’를 다룬 첫 번째 영화니까 제가 받은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흑백은 살아남은 이들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어요.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소녀(김수안 분)의 눈을 볼 수 있을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요. ‘군함도’의 역사는 과거가 아니에요. 현재에도 남아 있죠. 흑백의 이미지를 통해 시선 분산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철두철미하게 접근했다. 류 감독의 평소 연출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작품이 작품인 만큼 잘 짜놓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늘 변수는 있었다. 류 감독에게 “연출을 하면서 계획이 바뀌거나 의도치 않았지만, 더 잘 담긴” 장면을 물었다.

“그런 건 주로 배우들에게서 나와요. 예상치 못한 기운이 현장에서 포착될 때가 있거든요. 보통 그런 건 배우와 배우가 만나 앙상블을 이뤘을 때 나와요. 캐스팅 단계부터 ‘이 역할엔 이 배우가 맞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분장하고 카메라 앞에 섰을 땐 또 다르거든요. 특히 칠성(소지섭 분)의 경우 머리도 삐뚤빼뚤하게 깎고 훈도시(남자의 국소를 가리는 데 쓰는 아주 좁고 긴 천)만 입은 채 액션을 하니까 ‘우스워 보이면 어떡하냐’며 걱정이 컸는데 카메라 앞에 서니 달라지더라고요. 엄청난 아우라를 느꼈죠.”

때때로 배우들의 호흡은 치밀하고 정교한 류 감독의 계산을 벗어나곤 했다. 역할에 완벽히 몰입하고 상대를 신뢰해 만들어진 연기에 류 감독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이 같은 호흡이 가장 빛났던 건 강옥(황정민 분)과 소희의 고무줄 신이었다.

“(황)정민 선배는 이따금 ‘선물’처럼 준비해온 연기를 보여줄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컷을 조금 늦게 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그날이 딱 그랬어요. ‘아, 뭔가 하나 가져왔구나’ 생각했었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고무줄을 하던 정민 선배가 ‘비행기!’하고 외치면서 수안이를 번쩍 드는 거예요. CG로 파도를 만들 때 ‘자연도 이 부녀를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으면’하고 바랐는데 정민 선배의 애드리브로 더 뭉클해졌어요. 그땐 진짜 짜릿했어요. 현장 여성 스태프들은 펑펑 울고 그랬다니까요.”

묵직하고 아픈 역사를 소재로 했지만 류 감독은 이들을 경쾌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전형적일 수도 있는 캐릭터들을 비틀어 보는 이들을 더욱 뭉클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류 감독은 위안부 피해자인 말년을 그리고 표현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 자료를 많이 참고했어요.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본인이 겪은 일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태도였어요. 충격받은 장면 중 하나가 할머니께서 인터뷰하시다가 배에 문신이 새겨졌다고 얘기를 하시면서 저고리를 막 풀어헤치시는 거예요. 몸 자체가 역사인데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시더라고요. 아주 차분하게. 산업 위안부 피해자들은 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또 달라요. 이분들은 ‘돈을 벌어왔다’는 누명까지 쓰고 있어요. 이중의 고통을 겪고 계시죠. 그렇기 때문에 (연기적으로) 자극하고 동정받도록 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가 어떻게 동정을 하죠? 이건 우리가 알아야 할 참상(慘狀)이에요. 동정은 금방 사라집니다. 최대한 절제해서 사실을 더욱 뼈아프게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인물들을 동정하지 않는 태도. 감정을 절제하고 자극을 최소화한 것은 살아계신 피해자들에 대한 류 감독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는 “제가 다루고 있는 인물들로 선동영화를 만들 수 없다”며 “쉽게 자극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동정하는 시선이 발생한다면 더욱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아픈 역사라고 하면서 사실은 보고 싶은 이미지를 만드는 거예요. 저는 그런 태도가 더 위험하다고 봐요. 그게 진짜 왜곡인 거죠.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전쟁, 그 속에서 일그러진 인물들이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고자 웃고 떠들며 살 궁리를 해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화투를 치는 것처럼. 보통 장례식장에 모여서 상주를 위로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잖아요? 그런 거랑 비슷한 거죠. 본질적으로 한쪽이 무너졌을 때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우리가 아픈 역사를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이런 활력 덕이에요. 아픈 역사라 비참한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 그건 우리를 잘못 보는 거죠. 촛불광장을 보세요. 우리가 그곳에서 분노만 했나요? 그보다 더욱 무서운 에너지는 활력이었어요. 웃고 춤추면서 우리가 함께 모이면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했죠. 이러한 움직임이 분명 있는데 어떤 시선에 맞추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왜곡이 아니겠어요?”

예민한 기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군함도’가 주는 무게며 부담감도 엄청난 데다가 개봉 후 불거진 역사 왜곡, 스크린 독점 논란에 시달렸으니. 류 감독은 “이미 다 만들어진 영화고 이후 문제들은 제가 해결할 수 없다”면서도 “역사 왜곡, 스크린 독점 논란은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베를린’을 찍을 땐 제작비 압박이 컸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압박보다 본연의 일에 집중하게 됐죠. 우리 영화가 올바르게 만들어지고 있나? 영화로서 가치가 있나? 영화적 흥분은 잃지 않으면서 목적을 향해 가나? 그런 고민들이었죠. 그런데 역사 왜곡이 터졌네요. 사실 그건 말도 안 돼요. 영화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식민사관을 조장하지는 않았어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사실을 밝혔고 창작된 인물이라도 시대적 배경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이죠.”
 

‘군함도’가 대중에게 알려진 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류 감독조차도 2013년 봄에 처음으로 ‘군함도’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고.

“저는 이 영화가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어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가 왜곡이냐’라고요. 우리 제작진이 영화를 만들며 제일 애먹었던 게 ‘군함도’의 자료가 없어서였거든요. 일본인 르포 작가 하야시 에이다가 ‘왜 한국에는 군함도 전문가가 한 명도 없냐’고 할 정도로 ‘군함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요. 정보가 없는데 영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분들은 어디에서 정보를 얻으신 거죠?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시다는 거죠? 되묻고 싶을 정도예요.”

스크린 독과점 논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류 감독은 “스크린 독점에 문제 제기를 하는 건 찬성하는 입장”이라면서도 “많은 영화를 만들며 이런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는데 하필 이 작품으로 논란이 불거진 게 속상하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대기업 수직 계열로 얽힌 배급사·멀티플렉스 극장이 배정한 스크린 수와 관련해 영화감독은 어떤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이 문제에 대답하다 보니 솔직히 화도 나더라고요. ‘이걸 내가 왜 대답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극장·배급업자들을 모르거든요. 전 단순히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하는데 독과점 논란에 완전히 묻혀버렸어요. 그 점이 속상하고 또 화가 나지만 이번 기회에 대중도 좀 더 정확히 어디에 요구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 같아요. 오히려 잘된 일 같네요.”

 

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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