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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첫사랑
  • 홍기확
  • 승인 2017.03.20 1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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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137>

후배의 돌잔치. 그럭저럭 시집갈 나이가 된 여자 후배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잠시 말문이 멈추었다. 보통 돌잔치에서 처녀가 묻는 것이란, ‘부조금 얼마 할까요?’나, ‘와이프는 뭐 하는 사람이래요?’ 정도의 금전 관련이나 신상 털기. 그 이상의 질문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후배의 뜬금없는 압박질문에 내 머릿속은 속사포 같이 2007년 8월 29일 8시 42분으로 떠난다.

 

『내 아들아』

                                    최상조

너 처음 세상 향해

눈 열려

분홍 커튼 사이로 하얀 바다 보았을 때

 

그 때처럼 늘 뛰는 가슴 가져야 한다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 눈으로 보지 말고 두 눈 겨누어 살아야 한다

 

깊은 산 속에 키 큰 나무 곁에

혼자 서 있어도 화안한 자작나무같이

내 아들아

 

그늘에서 더욱 빛나는 얼굴이어야 한다.

 

운 좋게 아내의 뱃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아내야 아프던 어떻던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였다. 그 날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진통이 시작되자 이것저것 짐을 챙겨 나왔던 터였다.

뱃속에서 아이가 나왔다. 얼굴부터 나왔는데 단잠을 깨웠는지 몰라도 잔뜩 짜증난 표정이었다. 불만이 가득했다. 나오자마자 힘차게 오줌을 외할머니에게 쏘아댔다. 보통의 인간들은 긴 잠을 자고 난 후 오줌을 싸는 게 일반화되어 있다. 내 아들이 인간이라는 증명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말을 할 수 있는지 확인 차 의사가 아이의 엉덩이를 세차게 때린다. 당연히 울 수밖에 없다. 태어난 지 1분이 채 안 된 아이는 웃거나 울거나하는 게 보편적이다. 의사가 나에게 아이를 안겨준다. 대충 몸을 닦긴 했어도 몸 주위에 피가 묻어있다. 솔직히 더럽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를 안아보았다. 떨어뜨릴까 겁이 나서 안는 시늉만 하고 어머니에게 아이를 안겼다. 사실 엄마를 닮은 것부터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음날. 아이가 예쁘게 씻었나 보다. 간호사가 아이를 보러 오라고 한다. 유리창으로 아이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외쳤다.

 

‘이훤아, 아빠야, 아빠!’

 

그 유리창을 통해 소리가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는 관계없다.

아이가 내가 부르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는 관계없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실 그 때 받은 느낌이 후배가 물었던,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의 답변이다.

후배의 질문에 느낌을 말하지 않았다. 느낌을 문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재주는 있지만, 나누기에 아까워서다.

돌잔치에서 후배가 안고 있던 조그마한 아이를 안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 11년간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아본 적 없다. 그간 안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피했다. 다른 아이를 안는다면, 왠지 내 아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다. 유난스런 고집이고, 끈기다.

 

사랑과 관련된 호르몬은 크게 두 가지. 옥시토신과 페닐에틸아민이다.

옥시토신은 상대방에게 첫눈에 반했을 때 왕성히 분비된다. 또한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쯤 분비가 시작되어 태아가 나오고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지속된다. 이 호르몬으로 인해 첫인상이 좋으면 호감이 계속된다. 산모는 산통을 잊고, 모성애를 부추기며, 아이의 울음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어찌 보면 아이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또한 옥시토신은 육아의 고통을 ‘망각’하게 만드는 호르몬이다. 첫째 아이 때문에 죽게 아팠어도 둘째, 셋째를 낳을 수 있는 의욕을 만들어준다. 또한 엄마들이 흔히 말하듯 ‘우리 애 어렸을 때 힘들긴 했던 거 같은데, 어떻게 키웠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라는 수 천 년의 격언을 만든다.

한편 사랑에 콩깍지가 씌었을 때 왕성히 분비되는 호르몬이 페닐에틸아민이다. 이 호르몬은 분비가 오래 되지 않는데, 사랑의 유효기간이 300일이라는 근거는 어찌 보면 이 호르몬 때문이다. 사랑 뿐 아니라 몰입을 할 때 분비되며, 시간의 흐름을 잊는 ‘무아지경’을 만들어낸다.

 

아이는 계속 자란다. 이제 커버린 아이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와 첫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순간 그 눈빛과 그 때 분비되던 옥시토신. 하지만 그 때의 감정을 자꾸 잊게 만드는, 망각을 부르는 못난 옥시토신.

그리고 아이가 커갈 때. 행복했던 시절 분비되던 페닐에틸아민. 아직까지, 아니 평생토록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자식이 ‘아기’로 남게 만드는 콩깍지. 페닐에틸아민.

 

사랑의 유효기간은 300일이 아니다. 3,000일이 넘어도 그대로다.

점점 내 품안에서 미끄러져가는 아이지만, 허용된다면 평생토록 아이의 소원 몇 개 정도는 더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는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셨다

그 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 지고 걸어온 길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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