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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농작물에 손해를 주는 등 민폐가 심하옵니다”
“말이 농작물에 손해를 주는 등 민폐가 심하옵니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11.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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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20> 10소장의 시작

“제주 섬 안의 일은 마정(馬政)보다 막대한 것이 없고, 백성의 힘이 곤란한 것도 또한 마정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마정을 급하게 하면 백성에게 해가 되고, 이를 늦춘다면 행정에 손실을 입히게 됩니다. 예부터 섬을 다스림에 있어 알맞게 하기 어렵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문(文)이 폐단이 생기면 질박함을 숭상하게 되고, 일이 막히면 반드시 변합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고 가축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왕정이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제주에 목사로 왔던 이형상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의 일부로, 그의 저서인 <남환박물>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가 제주에 목사로 왔던 때가 숙종 28년(1702)이었으니, 이때 말과 관련된 문제점을 제대로 들여다본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자칫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게 말을 부리는 일임은 알면서도, 느슨하게 관리를 했다가는 행정에 막대한 손실을 입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말 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제주목사로 오기 전후의 말 관리 사정이 달라진다. 그가 제주에 오기 2년 전인 숙종 26년(1700)엔 제주 도내에서 1008마리의 말이 태어났으나, 사고를 당해 죽은 말은 태어난 말보다 훨씬 많은 1111마리였다. 자신이 제주목사로 와서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그가 제주에 온 숙종 28년엔 1678마리가 태어났고, 죽은 말은 524마리로 <남환박물>에 적고 있다.

 

이형상은 목사 신분으로 제주의 말을 총괄했다. 자신의 밑에 있는 판관이나 현감은 감목관의 역할을 겸했는데, <남환박물>을 들여다보면 은근히 자신이 일을 잘 해서 조정에 보낼 말이 늘었다고 하고 있다. 잘 관리를 해서인지, 아니면 “마정을 급하게 하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는 말과는 달리 백성을 괴롭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10소장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는 ‘산장구마.

 

어쨌든 제주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컸다. 목사들은 제주 백성들이 말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조정에 보낼 말을 다루는 일을 제쳐놓을 수는 없었다. 말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초 목장이 설치된다. 흔히 제주에 설치된 목장을 ‘10소장’이라고 한다. 말을 관리하는 곳 10곳을 뒀다는 말이다. 10소장은 제주목에는 6곳, 대정현과 정의현에 각각 2곳이 있었다. 그럼 10소장 체제는 언제 구축됐을까. 고려 때까지는 이런 체제는 아니었다. 10소장은 인구가 늘고, 그와 더불어 말에 의한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제주는 땅은 좁은데 축산은 번성합니다. 가난한 백성의 땅은 한두 뙈기 밖에 안 되는데, 농작물의 싹과 잎이 조금 클 때면 권세 있는 집에서 마소를 마음대로 풀어놓아 그 싹을 다 뜯어 먹어도 가난한 백성은 감히 고소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소를 놓아 먹여 백성의 곡식을 손상시킨 자는 그 집의 주인을 관직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법에 따라 죄를 내려 백성의 고통을 구제해주십시오.”(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6월 10일 정묘)

 

찰방 김위민이 올린 글로 말과 소 때문에 농작물 손해를 입는 백성의 안타까운 사정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말을 지금의 노루처럼 유해동물로 지정할 일도 아니었고, 당시 백성들은 억울함을 비빌 언덕이 없었다.

 

그런데 인구 증가는 되레 말이 먹을 초지를 부족하게 만드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말 때문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기는 하지만, 평지를 계속해서 개간하게 되면서 초지가 부족하게 됐다. 산과 들에 마구 풀어놓던 말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는 단초가 제공됐다는 말이다.

 

여기엔 고득종의 제안도 한몫했다.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이 상호군이라는 벼슬 위치에 있을 때 상소를 올린 게 있다. 그는 한라산에 목장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그는 한라산 중산간 일대에 둘레가 4식(息) 가량 되는 목장을 만들어 방목하게 하고, 목장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땅을 옮기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땅을 떼어줄 것을 간청한다. 이때 1식은 30리 가량이니, 4식은 120리 규모가 되는 땅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둘레가 40㎞에서 50㎞는 됨직하다.

 

고득종의 상소는 세종 11년(1429) 시행하도록 명령이 내려지고, 이듬해 목장이 만들어진다. ‘세종실록’엔 아주 짧게 한라산에 목장을 만들었다는 글이 있다. “한라산의 목장을 개축했다. 주위가 165리다. 목장내에 사는 344호를 옮겼다”고 돼 있다. 세종 12년(1430)의 일이다.

 

정리를 하자면 인구 증가와 말에 의한 농작물 훼손이 급증하며 말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장 개축이 요구됐고, 그 요구를 받아들여 세종 때 목장이 만들어졌다. 지금 부르는 10소장의 기초가 이뤄진 셈이다.

 

고득종의 제안으로 목장체계가 구축되는데, 고득종이 파면당하는 일이 생긴다. 목장을 만들면서 담을 쌓게 되는데 이게 말썽이었다.

 

“앞서 제주에 목장을 만들지 않을 때는 한라산 허리로부터 평야에 이르기까지 말을 놓아 마음대로 다니면서 키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주위에다 목장을 만들어 말을 가두니 말은 많은데, 목장의 풀은 잘 자라지 않습니다. 또한 목장 밖을 통행할 수가 없어 말은 야위고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1434) 5월 1일 정축)

 

위 글을 보면 세종 때 목장이 만들어진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목장이 구축되기 전에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말을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다는 걸 이 글을 통해 알게 된다. 하지만 어쨌든 이 글은 목장을 만들어서 관리한 이후엔 말 키우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다. 이후 얘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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