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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안 북쪽 동-서쪽 잇는, 일제강점기 새로 만든 옛길
제주성안 북쪽 동-서쪽 잇는, 일제강점기 새로 만든 옛길
  • 하주홍 기자
  • 승인 2016.08.0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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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옛길을 걷다]<8> 북신로(北新路) (1)
칠성로·관덕로와 원도심 상권 중심…‘랜드마크’ 북초등학교

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성’을 바탕으로 한 제주지역 지리·역사적 근원지이자 중심이다. 이곳은 제주 과거와 현실이 함께 포개진 역사문화공간이다.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며 생활공간이다. 원도심의 동맥은 ‘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제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옛길’을 취재, 역사·지리·건물·상권·문화·인물 등 삶과 기억의 궤적을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제주 원도심 위상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생과 미래설계를 찾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북신로

# ‘북신작로’생긴 지 100년 앞둬…상권·역사적 자취 다양

제주시에서 바다와 가까이 북쪽에 동서로 가로질러 뻗은 가장 대표적인 길 가운데 하나가 북신로(北新路)이다.

제주성안 옛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생겨 비교적 덜 오래됐다. 그래서 이 길을 성안 옛길로 분류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길 나이가 100년을 바라보고 있고, 옛 정취와 역사적 자취를 많이 담고 있는 길임은 분명하다.

60대를 넘긴 나이든 제주시 토박이들은 이 길을 ‘북신로’보다 되레 ‘북신작로’(北新作路)라고 익숙하게 들어왔고 불렀던 이름이기도 하다.

이 길은 당초 1920년께 당시 일제가 제주성안에 대한 대대적인 토목사업의 하나인 이른바 ‘신작로’사업으로 북쪽에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신로는 동쪽 끝이 산지천과 맞닿는 ‘산지목골’ 옛 산지교(山地橋)에서, 서쪽 끝은 제주북초등학교 앞을 지나 ‘무근성’ 입구인 ‘북성로’(北城路)까지 1.1㎞ 너비 10m 길을 일컫는다.

그러나 북신로는 엄밀하게 서쪽 끝을 제주북초등학교 앞에서 시작, 동쪽으로 ‘산지목골’까지로 규정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제주에 새로 난 길은 ‘북신로’와 ‘원정통’(관덕로)와 ‘산지로’ 등을 꼽을 수 있다.

북신작로 포함한 제주성안 옛길지도

# ‘북신로’ 주위엔 객사골·옥골·창신골 이어져

먼저 북신로에서 남쪽으로 맞닿는 길인 ‘객사골’(객삿골·객사동·客舍洞)을 꼽을 수 있다.

원래 현재 제주북초등학교 동쪽 전매소 터엔 ‘영주관’(瀛洲館)이란 제주 객사대청(客舍大廳)이 있었다.

현재 노인복지회관(옛 제주도지사관사)북쪽으로 목관아터(옛 경찰서)로 골목길이 나 있었다. 학교정문 앞에서 남쪽으로 난 골목 주위를 ‘객삿골’이라 했다. 삼도2동과 일도1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객사는 육지에서 출장 온 관리들이 묵는 숙소였다.

‘영주관’은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조선 숙종 15년(1689년)에 목사 이우항(李宇恒)이 재건하고, 순조 3년(1803년)에 판관 조경원(趙慶遠)이 중수했다.

「탐라지」(耽羅志)에 “영주관은 북성 안에 있다. 바로 객사대청이다(瀛洲館 在北城內 旣客舍大廳)”이란 기록이 있다.

북신로에서 남북쪽으로 ‘창신골’과 맞닿게 난 길이 ‘옥길’이다. 북신작로에서 북쪽으로 성굽사이엔 옥터가 있었다.

그래서 이 길은 옥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살던 ‘옥골’(창신골 옆)에서 옥을 가는 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북신로 남쪽엔 ‘창신골’이 있다. 창신골은 칠성골 옛 아세아극장(중앙극장)에서 제주북초등학교 앞 객사골 사이에 난 길을 말한다. 창신은 제줏말로 ‘가죽신’을 말한다.

이곳은 과거에 창신(가죽신)을 만들었던 천민들이 살았던 곳에서 유래한다.

창신골 가까이에 관아가 많았고, 관리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가죽신을 찾는 고객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북신로 동쪽(2016년8월)
 

# 개교 110년 앞둔 제주 명문 제주북초등학교

북신로는 일제 강점기에 朝日町(아사히마찌)로 불렸다.

길 가까이엔 제주성안 동서로 난 길 가운데 제주 상가형성 원조격인 本町(혼마찌·뒤에 칠성로)와 元町(모토마찌·뒤에 관덕로)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관공서·상가·주택가가 두루 몰려 있어 명실공히 제주시내 ‘3대 거리’로 번창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제주 유적지와 함께 8.15광복 이후부터 20여 년 전인 1990년대까지도 일본인이 주택이나 사무소로 쓰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적산가옥이란 1945년 8.15 광복 이전까지 우리나라 안에 있던 일제(日帝)나 일본인 소유의 집을 광복 뒤에 이르는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주택가를 이뤘고, 관공서·공장 등이 만이 들어섰다.

인근에 형성된 상권과 함께 제주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북신로를 말할 땐 명문 제주북초등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이 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육상지표)는 확실히 제주북초등학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북초가 본도 최초 현대식 초등교육기관 효시로서 110년 전통을 갖고 있는 등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융희(隆熙) 원년(1907년)에 제주군수였던 윤원구(尹元求)가 ‘영주관’ 한옥 2채에 제주공립보통학교(濟州公立普通學校)로 문을 열었다.

뒤에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공립심상소학교(濟州公立尋常小學校)→제주북공립국민학교→제주북국민학교→제주북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로써 이 학교는 2006년에 100회 졸업생에 이어, 올해(2016년) 106회 졸업생까지 배출해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 학교는 광주 서석(光州瑞石)소학교, 목포 산수(木浦山手)소학교와 더불어 전남지역 ‘3대 소학교’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 학교가 제주지역에서 뛰어난 인재들은 많이 배출한 전통이 있는 학교였지만 지금은 ‘원도심 공동화 현상’등으로 재학생이 크게 줄어들어 고민을 낳고 있기도 하다.

현재 북신로 제주북초교 남쪽 지역은 제주목관아가 복원됨으로써 문화재지구가 됐고, 북초등학교 부근에서도 유물·유적 등이 발굴되고 있어 앞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앞으로 관덕정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 문화재 벨트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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