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2-22 16:31 (목)
기억과 망각, 그 오묘한 줄다리기
기억과 망각, 그 오묘한 줄다리기
  • 홍기확
  • 승인 2016.07.20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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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27>

 기억력이 매우 빈약하다. 질병명은 초단기 기억상실증이다.
 이렇게 불량한 내 머리를 돕기 위해 하는 거의 유일한 노력은 습관 만들기다.

 습관은 편하다.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 않고 자동적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 생각의 횟수를 줄이고, 고민의 깊이를 낮추어 준다.
 하지만 습관의 단점은 고착화된 행동 그 자체에 있다.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거의 바꾸지 않는다. 꼭 그 길로만 간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먹는다. 집에 들어오면 발부터 씻는다. 이를 닦을 때에는 왼쪽 이들, 오른쪽 이들, 윗니, 아랫니, 혓바닥 순으로 닦는다.
 가던 길을 바꾸면 길을 잃는다.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하루 종일 리듬이 깨진다. 집에 들어와 발을 씻지 않으면, 불안감과 청결에 대한 욕구로 집안에서도 발꿈치를 들고 종종걸음을 걷는다. 이를 닦을 때 윗니 아랫니 순서가 바뀌면 빈정이 상해서 대충 닦고 입을 씻는다.

 다이어리와 스케줄러, 플래너를 20년 가까이 쓰고 있다. 다이어리에 적고 까먹기 위함이다. 정보의 홍수는 단기 기억들을 붙잡지 못한다. ‘적자생존(적는 자가 살아남는다)’처럼 생활하고, 다이어리가 없으면 업무든 가정생활이든 제대로 못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이러니 아이도 마찬가지다. 계획을 세우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습관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에게 마사지를 받고, 머리를 감은 후 말리고, 아침밥상이 차려있든 아니든 졸면서 밥상에 앉아 있다. 밥상머리에서 식사를 하며 ‘식구(食口)’답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아이는 어제 벌어진 일이나 앞으로의 계획과 할 일을 얘기한다. 마지막으로 이를 닦고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간다. 지독할 정도로 계획성이 바르다. 패턴이 가끔 달라질 때도 있지만 최근 몇 년간 한결같다. 컨디션 좋은 날에는 밥상에 앉아서 조는 대신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정도다.

 미국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미래를 준비할 수 없지만, 적어도 미래를 대비해서 우리의 어린이들을 준비시킬 수는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를 닮아가기도 하지만, 나와 달라지기도 하고, 일부분은 나를 추월했다.
 지금까지의 판단으로는 망각력은 월등히 나보다 뛰어나다.
 망각력을 통한 회복탄력성으로 인해 은하계제일초특급울트라슈퍼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태양계제일초특급슈퍼 긍정적인 엄마나, 신생훼밀리아파트가동최고 긍정적인 아빠보다 미래가 밝다.
 물론 아빠한테 혼난 후 시무룩해졌다가도, 5분 만에 다시 깔깔대며 노는 모습은 망각력(혼난 것)이 뛰어난 만큼, 기억력(혼난 것)은 그에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어쩌면 생활에서, 밥상머리에서 아이에게 미래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질 기억에 대응하는 습관을 만들어주며, 망각의 효용성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기억 대 망각의 줄다리기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 아내가 밖에 나가며 나에게 숙제를 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피부과에 가는 숙제다. 10시. 아이에게 병원에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자 아이 왈.

 “아빠, 나 10시 30분에 공부방 가야 하는데?”

 어? 맞다! 어제 아내가 말했었지. 이 자식 다이어리도 없는데 어떻게 그걸 기억했지? 기억력 장난 아닌데? 그리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숙제를 못한 나는 어떡하지? 이제 아내에게 혼날 일만 남았네.

 어쨌든 망각력에 이어, 기억력도 아이가 나보다 뛰어나다. 아이는 나에게 2승을, 나는 2패를 떠안았다. 계획성이나 기억과 망각의 줄다리기에 있어, 모두 아이가 나보다 뛰어나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고 위안을 삼으며, 아내에게 혼날 생각에 불안하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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