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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매번 말을 선물로 받는데 어찌 둔한 것들 뿐이냐”
주원장 “매번 말을 선물로 받는데 어찌 둔한 것들 뿐이냐”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6.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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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5> 태조 이성계와 말[馬]

제주는 말의 고장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말의 고장으로 불리는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말을 키우던 목마장이 널렸던 곳이 제주였고, 지금은 말산업 특구로 지정될 정도이니 말의 고장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제주에만 말이 있었을까. 아니다. <탐라순력도>에 실린 말 이야기를 하기 전에 조선시대 말에 대한 이야기를 쫓아가보자.

<조선왕조실록>의 ‘태조실록’은 이성계를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조실록’엔 이성계의 현란한 활솜씨를 비롯한 전투력을 상세하고 그리고 있다. 어찌 보면 중국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전투장면이 따로 없다. 실제로 태조 이성계가 그렇게 뛰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역사서술에 등장하는 이성계의 활솜씨는 천하에 따를 자가 없었다.

“하천에서 적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한 별도로 턱도 보호하는데 두루 감싼 것이 튼튼해 쏠 틈이 없었다. 그러자 태조는 (적장이 탄) 말을 쏘았고, 말이 뛰자 적장은 힘을 내 고삐를 당겼다. 그때 적장의 입은 열렸고, 태조는 그 입을 쏘아 맞췄다.”(‘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 기사)

‘태조실록’ 총서는 이성계의 가계와 고려 당시 이성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태조가 조선 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위의 총서에 담긴 기사는 원나라 장수인 나하추와 이성계가 벌인 전투에 담긴 이야기의 일부로,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장수는 나하추는 아니다. 이성계의 활에 나가떨어진 장수는 입을 벌릴 때를 빼고는 어디 하나 틈을 주지 않게 갑옷으로 탄탄하게 무장을 하고 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활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적장의 입이었고, ‘태조실록’은 활로 말을 먼저 쏘아서 적장의 입을 열게 만든 뒤 적장을 죽였다는 내용을 드라마처럼 쓰고 있다.

당시 전투는 말 위에 올라타서 벌이는 기마전이었다. 이성계가 적장과 붙을 때는 말 위에서 모든 게 이뤄졌다. 이성계는 나하추와 직접 대면을 할 때도 말 위에서 싸움을 진행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나하추가 이성계를 향해 싸움을 그만하자고 했으나 이성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조실록’엔 나하추가 싸움을 그만하자고 한 건 거짓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성계가 나하추를 몰아붙인 이유는 그에게서 항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나하추는 이성계를 당하지 못해 도망가고, 나하추는 나중엔 이성계에게 화해하자는 의미에서 말을 선물로 줬다고 기록돼 있다.

‘팔준도’에 나와 있는 횡운골. 원나라 장수 나하추와 싸울 때 이성계가 탔다고 하는 말이다.
‘팔준도’에 있는 응상백. 제주산이라고 한다.

이성계와 말의 관계는 그가 탄 말을 그린 <팔준도>에도 잘 나와 있다. <팔준도>는 조선후기 작품으로 누가 그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팔준도>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타고 다닌 아주 뛰어난 8마리의 말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8마리 말은 횡운골, 유린청, 추풍오,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왕, 현표 등이다. 이 가운데 ‘횡운골’은 나하추를 쫓아낼 때 탔다고 한다. 횡운골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외나무다리에서도 이 말을 타고 평지처럼 빨리 달렸다고 한다. 횡운골은 여진(女眞) 지역에서 생산된 말이며, 8마리 가운데 제주산은 응상백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말을 좋아하기는 했는데, 문제는 조선을 건국한 뒤 명나라에 바치는 ‘진헌마’였다. 진헌마는 조선이 명나라에 바친 예물로, 청나라 때까지 이어진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정자위를 보내 진헌마 1000마리를 요동에 보내고 돌아왔다.”(‘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7일)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세우고 왕에 오른다. 즉위한 날은 그해 7월 17일이다. 진헌마 1000마리를 명나라에 처음으로 보낸 날은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른지 한달여만이다. 명나라 임금에게 보내는 예물인 진헌마는 수시로 올려 보냈으며, 말 숫자도 적지 않았다. 한해에 1만마리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진헌마를 보내는 숫자가 많아지면 결국은 백성들이 힘들게 마련이다. 또한 숫자만 채우면서 품질이 떨어지는 말을 예물로 보내기도 했던 모양이다. 때문에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 임금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기까지 했다. 태조 3년(1394)에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이렇게 꾸짖었다.

“매번 말을 가져오면서 말을 기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징발하여 보니, 말이 모두 둔하고 타서 지친 것들 뿐이다. 이번에 바친 말 중에는 다리가 병들고 이빨도 없는 것과 길들이지 않은 것이 반이나 된다. 나머지는 비록 관절병은 없지만 모두 둔하고 지성으로 바친 물건이 아니다. 이런 것 때문에 화를 낼 실마리를 만들기보다는, 수량을 줄이더라도 물건이 좋다면 어떤가.”

태조 이성계는 이에 대해 해명을 한다.

“이유를 알아보니 조선에서 생산되는 말이 본래 작고 둔합니다. 진헌을 할 때는 가려서 바치게 됩니다. 말을 건네러 가는 길이 매우 멀기 때문에 병들고 피곤해 약한 것도 있겠지만 어찌 제가 감히 업신여기겠습니까?”

말을 중국으로 보냈다가 기죽은 이성계의 하소연이 느껴진다. 그런데 조선초에 잦았던 진헌마는 차츰 규모가 줄어든다. 아니, 줄었다기보다는 다른 특산물과 함께 바쳐진 선물의 일부였다고 보는 게 낫겠다. 말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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