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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기억하는 이별식…‘실연에 관한 박물관’
영원히 기억하는 이별식…‘실연에 관한 박물관’
  • 조보영 기자
  • 승인 2016.05.06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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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2개국 35개 도시 순회, 오는 9월 25일까지 아시아 단독 개최
제주시 아라리오뮤지엄서 국내·외 113점 실연 물품 및 스토리 전시
무지개 한 조각_한 평생 무지개를 좇다가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소년의 이야기. 무지개 한 조각이었던 트로피는 자랑스럽게 우뚝 서질 못하고 쓰러져있다.

작품 하나. 내 인생의 무지개 한 조각-쓰러진 트로피

무지개를 좇는 소년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난 소년은 중상을 입고 테러를 당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사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생겼지만 무지개는 계속 그를 불러댔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소년은 그제서야 자신의 마음속에 무지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이미 떠나간 후였다.

세계 최고의 비행사가 되기 위해 지난 30년간 열다섯 나라에서 열기구 비행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2006년 헝가리에서 열린 국제열기구경기장에서 동양인 최초로 3위 입상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 트로피를 우뚝하게 세워놓을 수가 없다. 자신의 무지개 조각 중에 하나인 그 트로피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 차를 부탁해_7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아끼던 자동차. 앞마당에서 눈비를 맞으며 가족을 지켜주던 자동차를 이제 떠나 보내려 한다.

작품 두울. 아빠 차를 부탁해

“아빠랑 코란도를 타고 산으로 오프로드를 달려서 고기를 구워 먹은 생각이 아직도 선명해요. 교회를 마치면 엄마는 봉사를 하고 늦게 오니 아빠가 미역국을 끓여주셨어요. 그때는 꿀맛이었어요. 아빠랑 같이 게임을 할 때는 정말 신이 났어요. 나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아빠 안고 울고만 있을 것 같아요.” -아들의 편지 중

7년 전 사고로 떠난 아버지는 유독 코란도 차를 좋아했다. 마치 가족을 지켜주던 아빠의 모습처럼 마당 한켠에서 눈비를 맞으며 우직하게 서 있던 자동차가 이제는 시동도 걸리지 않고 문도 잘 열리지 않는다. 아들은 나중에 이 차를 고쳐서 아빠랑 갔던 산을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한쪽 타이어가 삭아서 내려앉은 이 차를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것 같다.

마지막 빵_제주 4.3 당시 트럭에 실려 끌려간 남편에게 주머니 돈을 털어 빵 한 봉지를 선물한 아내는 아직도 남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작품 세엣. 마지막 빵, 못다한 이야기

어느 여름날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이 남편을 동네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태웠다. 어제도 굶고 오늘도 굶은 남편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두려움에 떠는 남편의 눈빛을 보았다. 남편이 너무나 가여웠다. 마침 마을 동녘 길가에 빵장수가 있었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돈을 꺼내 빵을 사러 뛰어갔다.

빵 한 봉지를 사들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차위로, 온 힘을 다해 그 빵을 올리자마자 트럭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 빵 나눠서들 드시라는 말도 건네지 못한 채.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거라 믿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남편은 오지 않았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졌던 제주 4.3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떼어놓고 말았다.

천일의 램프_천 일을 기념으로 남자가 선물을 해준 램프에는 두 연인의 이름과 함께 '언제나 너의 곁에 변함없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크로아티아의 '실연에 관한 박물관' 창립자인 드라젠 그루비시치와 올링카 비스티카

떠나보냄과 동시에 영원히 기억하는 이별치유법

제주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호텔Ⅱ에서 진행 중인 ‘실연에 관한 박물관’에서는 총113편의 국내‧외 ‘이별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 최초, 2016년 아시아 단독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실연을 경험한 사람들의 물품과 사연이 익명으로 전시되는 독특한 컨셉의 스토리 전시다.

전시를 고안해낸 두 아티스트는 크로아티아에서 온 올링카 비스티카와 드라젠 그루비시치다.

실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별 이후 사랑의 징표였던 ‘토끼 인형’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 2006년 자그레브에서 작은 컨테이너를 빌려 두 사람과 지인들의 실연에 관련된 물품을 선보였다.

‘잠시라도 세상에 존재한 적 있는 모든 인연에 바치는 공간’으로 일컬어지는 ‘실연에 관한 박물관’은 이후 파리, 런던, 샌프란시스코, 베를린, 싱가포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브뤼셀, 바젤 등 세계 22개국 35개 도시에서 순회 전시를 이어오며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 사이 전시회도 진화했다. 단순히 남녀 간의 이별 경험만이 아닌 친구와 가족, 사회, 역사 나아가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생의 모든 성장과 치유를 포괄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영역이 확장된 것이다.

우린 어떤 가구를 들일까_남자친구와 미래에 함께 살 집을 생각하며 가구 미니어처를 만들었지만 색을 칠하기도 전에 이별을 맞게 됐다.
파란 대문_'공간 디자이너'의 기증품으로 어린 시절 기억 속 파란 대문의 흔적과 매일 이별을 하고 있는 자신을 표현한 사진 작품이다.

5일 아라리오뮤지엄 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올링카와 드라젠은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제주4.3을 처음 알게 됐다.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무거운 느낌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역사와 인간의 연결고리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시 소회를 밝혔다.

이어 실연 박물관을 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두 사람은 “실연의 경험을 무조건 지우는 것보다 추억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싶었다”면서 “전시에 참여한 기증자와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가 ‘공감’을 나누고 함께 ‘치유’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아라리오뮤지엄은 지난 2월 14일부터 3월 14일까지 한 달 간 SNS를 통해 ‘실연’이란 키워드로 국내 작품 82점을 기증 받았다. 그중 67점을 선별, 해외 각지에 수집된 46점의 물품들과 함께 총11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 기간은 오는 9월 25일까지다.

전시가 끝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 있는 실연 박물관 컬렉션에 영구 소장될 예정이다.

아라리오뮤지엄은 국내 기증품 82점 중 67점을 선별, 해외 각지에 수집된 46점의 물품들과 함께 총113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5층 전시실의 마지막 공간에는 물품을 기증하지 못한 관람객들을 위한 작은 책상과 빈노트가 마련돼 있다. 자신의 이별 사연을 직접 적을 수 있는 고백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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