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세월호 참사의 끝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세월호 참사의 끝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 조보영 기자
  • 승인 2016.04.10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아있는 기억, 세월호] <2>‘기억 공간 re:born’서 두 번째 추모행사
 

4.16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에게, 그날의 참사를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말… “하이 헬로 하와유?”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기억 공간 re:born’에서는 세월호 2주기 순회 전시 ‘두 해 스무네 달’ 오픈과 함께 리본 프로젝트 ‘하이 헬로 하와유’ 두 번째 만남이 시작됐다.

운영자 황용운 씨는 지난해 2월 제주에 정착,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지난해 4월 16일 이곳 선흘리에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기억공간 리본’을 열었다. 1년이 지난 2016년 4월 9일, 이곳은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쉼터이자 안식처로 자리 매김했다.

이날 자유 발언에 나선 문진(47세, 제주시 도남동) 씨는 “틈나는 대로 봉사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면서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내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비통한 마음을 표했다.

문진 씨는 “이곳에 올 때마다 느끼는 분노와 슬픔을 노란 리본과 목걸이, 팔찌를 만들면서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이것이 제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이라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정의롭지 못한 사회와 싸우는 방법은 바로 기억하는 것”이라고 소신을 밝혀 객석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두 딸을 키우는 동네아줌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오지수(39세) 씨는 예쁜 꽃 편지지에 아기자기한 손글씨로 직접 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저는 좀 겁쟁이라서 아이들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다가 이 기억공간 앞을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멈칫한다”고 전하며 울먹였다.

이어 “한번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문득문득 일상으로 들어와 뭔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면서 “그냥 가까이에서 바라봐주는 따뜻한 이웃이라도 돼주고 싶다. 얘들아, 우리 동네에 잘왔다”라는 따스한 인사말로 추모의 메시지를 보냈다.

세월호 2주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흘리 ‘기억 공간 re:born'을 찾아 추모 행사에 동참했다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의 진언 “세월호 참사의 끝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이날 행사에는 4.16을 기억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이유도 모른채 자식을 잃고 아직까지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세상과 싸우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함께 했다.

단원고 2학년 7반 故이민우 군의 아버지 이종철 씨는 작년 10월, 아들의 흔적을 되새기며 배를 타고 제주로 내려왔다가 현재까지 제주에 머물고 있다. 주중에는 기억공간을 찾은 방문객에게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봉사 활동을 하거나 주말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세월호 참사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추모 행사 참여자들 앞에 선 이종철 씨는 “우리나라에서 유가족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셔서 저희처럼 아픈 삶을 살지 마시라는 그 한마디를 꼭 드리고 싶다”고 절실한 목소리를 전했다.

총476명을 태운 세월호는 295명의 희생자와 아직 수습이 되지 않은 9명의 실종자가 발생한 대참사다. 이중 172명의 생존자도 기억해야 한다. 그중에는 ‘파란 바지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동수 씨도 있었다.

김동수 씨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를 대표해 “참사 후 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죽은 죄인이며 아직도 살아있는 시체다. 저는 세월호 뱃지나 리본도 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세월호이기 때문”이라면서 아직도 그날의 상처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괴로운 심경을 고했다.

참사 당시 화물기사로 세월호에 탑승했던 김동수 씨는 기울어져가는 배 안에 밧줄로 몸을 묶어 죽음의 기로에 선 단원고 학생 20명을 구조했다. 그러나 참사 이후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해를 시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조차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김동수 씨는 “참사 당시 해경특공대는 빈몸으로 왔다가 빈몸으로 갔다.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제주 4.3도 거의 50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밖으로 나왔다. 세월호의 죽은 영혼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함께 나서서 진실을 밝힐 것”이라고 각오를 내비쳤다.

단원고 2학년 4반 故박수현 군 아버지 박종대 씨는 4.16세월호 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참사 당시 대통령과 청와대는 물론 해수부, 행안부, 중대본, 해경상황실, 해경수뇌부, 현장출동세력, 진도VTS, 전남 119, 육경 등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 상황을 조목조목 짚었다.

박종대 씨는 “세월호 참사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조직의 전교생이 동시에 0점을 맞은 초유의 사태이자 인류가 존재하는 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점수”라면서 “만약 100점 맞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거나 평균 50점만 됐어도 이 참사는 예방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세월호 특조위 조사기간인 1년 6개월이 곧 종료된다. 대통령과 여당의 방해로 사실상 제대로 진행도 못하고 문을 닫게 됐다”면서 “세월호 특검과 3차청문회 등 아직도 진행해야 할 것들이 많다. 책임자들이 처벌될 때까지 좀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4.16을 기억하는 공간에서 서로를 보듬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월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참사다. 유가족과 생존자, 기억지킴이들은 오직 '기억의 끈'으로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에 진실의 닻을 올리는 중이다. 참사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이들의 기억과 공감은 계속 될 것이다.

<조보영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