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7:35 (목)
아버지의 그림자
아버지의 그림자
  • 홍기확
  • 승인 2016.03.25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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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18>

 『연탄길』의 저자 이철환은 말한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우리는 그곳에 가로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런 가로등 같은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 술 먹고 해롱대며 잔소리를 해대는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는 항상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어. 스물다섯살 때부터야 술을 시작했어.’라며 강조하신다. 어머니에게 깔끔한 아버지는 스물다섯살 이전 결혼초기가 그리운가 보다. 25살은 내가 태어난 해다.
 아버지의 주량은 전설로 남을 것이다. 전성기에는 소주 네 병을 기본으로 드셨다. 주말에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드셨으니 더 드실 때도 상당했다. 나 역시 30대 초반까지 집에서 반주로 소주 두 병을 먹었으니 주량도 유전이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보통 집에서 술을 드신다. 나 역시 집이 최고다. 친구, 친척, 외국인, 외계인, 말미잘 등 누구랑 먹는 것 보다 혼자가 좋다. 마누라가 앞에 앉아서 맞장구쳐주면 더 좋다. 이게 아버지와 비슷한 점이다. 결국 이렇게 되 버렸다.

 마음은 약하나 언제나 마음에 비수(匕首)를 품고 산다. 마음은 모질지 않으나 수많은 훈련으로 슬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순전히 나에게 있어 슬픈 이야기다.

 아버지가 구닥다리폰을 드디어 스마트폰으로 바꾸셨다. 역사적인 017번호 한 개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휴대폰의 알람이 두 번 울리니 한 번으로 조정하라고 하신다. 알람시간을 보니 새벽 두시. 40년 넘게 알람은 새벽 두 시다.
 며느리 연락처를 추가하라고 해서(가끔 술 먹으면 며느리한테 전화하는 통에 스스로 번호를 지워버렸다.) 보니 연락처는 달랑 7개. 휴대폰을 바꾼 후 입력을 안했다손 쳐도 아버지다운 가족, 친척, 지인들의 숫자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림자처럼 살았다.
 자신은 전화하지 않으며 어머니가 자식, 친척, 친구들과 전화로 통화하는 걸 귀 기울여 듣거나 나중에 내용을 물어본다. 자식이 와도 술 한 잔 안 먹으면 숫기가 없는지라 안방에 누워 자녀들과 마누라가 나누는 얘기를 엿듣는다. 물론 좋아하는 막장드라마의 볼륨은 박테리아가 사자후를 외치는 정도로 낮아져 있다.
 경조사는 어머니의 전담이었다. 심지어 본인 친척의 경조사라고 해도 사교성 좋은 어머니가 그 곳에 갔다. 아버지의 종친회에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가는 것도 보통이었다. 숫기 좋고 노래 잘하는 어머니는 종친회 노래자랑에 나가 상도 타오곤 했다.

 그런 아버지의 갑작스런 수술. 나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머니는 왜 올라 오냐 했지만, 통상적인 답변일 뿐 올라오니 든든하다고 한다.
 수술 전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병원에 계속 있을 테니, 아들을 병원에 두고 집에 가서 잤다가 아침에 다시 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챙길 것도 있으니 그러겠다했다. 하지만 한참 뒤. 어머니가 나에게 같이 집에 가서 자고 아침 일찍 함께 오자고 한다. 무섭다고 한다.
 어머니는 집에서 혼자 자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을 먹지 않고 집에서만 드셨다. 동네친구는커녕 직장 친구도 밖에서 만나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여행을 친구들과 가서 집을 비운 적은 있어도, 아버지는 단 하루도 집을 비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림자. 아버지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어두워졌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그림자. 밝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림자.

 입원 전날까지도 일을 나가셨다. 목디스크로 손가락이 엄지, 검지 두 개 밖에 안 움직이는데도 일을 나가서 생선 박스를 옮기셨다 한다. 어머니 불후의 명언, ‘네 아버지 생활력 하나는 끝내줘.’라는 말이 그림자처럼 슬프게 와 닿는다.
 내 머리와 시간의 20%만 일하는 데 쓰고 80%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쓴다는 신조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 때문에 신조가 흔들린다. 예전 베이비부머 세대는 생존을 위해 일했던 관성이 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십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유람하며 유랑하듯 직장생활을 하는 나는 왠지 죄송스럽다.

 어릴 적. 할머니와 자던 나는 가끔 악몽을 꾸면 부모님이 있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부엌에 달린 조그만 방에서 안방까지는 어린 나에게 공포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맨발로 쏜살같이 달려가 어머니의 품안에 쏙 들어갔다. 그러면 어머니는 잠결에 옹알대며 꼭 안아주었다.

 그때 곁눈으로 힐끗 보면 어머니 옆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인지 아버지였는지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악몽은 단잠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아침.
 보이지 않지만 그 그림자는 나를 따라다녔다.
 지금도 그 그림자는 그림자답게 내 곁에 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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