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도, 껍질도 진상될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아”
“생과도, 껍질도 진상될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아”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3.0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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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10> 조선시대의 감귤
조정에 올려 보낼 감귤을 선별하고 검사하는 그림인 '감귤봉진'이다.

감귤은 제주도민들에겐 효자임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대학나무’라고 불릴까.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딴판이었다. 감귤나무는 효자가 아닌, 제주도민들에겐 고통을 주는 나무였다.

앞서 감귤나무에 끓는 물을 부어 나무를 죽이기도 했을 정도로, 감귤을 진상하는데 따른 고통은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예전 제주도에 있던 감귤 종류는 어떤 게 있었고, 어떻게 키웠을까.

“여러 과실 중에서 금귤(金橘)과 유감(乳柑)과 동정귤(洞庭橘)이 상품이고, 감자(柑子)와 청귤(靑橘)이 다음이며, 유자(柚子)와 산귤(山橘)이 그 다음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조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세조 1년 때 제주도 안무사에게 감귤을 올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의사항을 지시한 내용의 일부이다. 여기엔 감귤 7개 품종만 들어 있으나 서유구가 펴낸 <임원십육지>엔 감귤 품종은 13개로 기록돼 있다.

‘세조실록’의 이 기사를 더 들여다보자. 여기엔 감귤은 3월에 열매를 맺어 9월에 익기 시작해 겨울에 딴다고 돼 있다. 품질을 결정짓는 요소도 잘 설명돼 있다.

“반쯤 익었을 때에 씨를 받아 심으면 유감(乳柑)이 감자(柑子)가 되고, 감자가 유자[柚]가 되고, 유자가 탱자[枳]가 된다. 이듬해 3·4월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서 씨를 받아 심으면, 반은 본 나무가 되고, 반은 다른 종자가 된다.”

잘 익었을 때 씨를 받아야 상품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맛은 품질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이 기사를 더 들여다보겠다.

“유감(乳柑)을 심어 감자(柑子)가 된 것은 몸이 작고 껍질이 연하고, 잘 터진다. 그 맛이 보통 것보다 갑절 좋지만 진상할 때에 부드럽고 연해서 쉽게 물러 허물어진다.”

감자(柑子)가 되면 맛은 좋지만 잘 물러서 이동하기에 어려움이 따랐다. 문제는 서울까지 올려 보냈을 때다. 때문에 나중에 죄를 물을까 두려워서 진상을 아예 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세조실록’은 이런 문제 해결책도 내놓고 있다.

“수령들이 책임을 두려워하여 맛이 좋은 물건을 진상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별도로 그릇을 만들어 담고, 사이에 다른 물건을 끼워서 부딪쳐 깨어지지 않게 하고, 표를 싸서 특별히 올리게 하라.”

조선시대 감귤은 매년 20차례 올려 보낸다.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0일 간격으로 감귤을 이동시킨다.

<탐라순력도>엔 감귤과 관련된 그림이 모두 3개다. ‘감귤봉진(柑橘封進)’과 ‘귤림풍악(橘林風樂)’, ‘고원방고(羔園訪古)’ 등이다.

‘감귤봉진’에는 감귤 품종별로 어느 정도의 물량이 올려 보내지는지를 적어놓았다. 개수로는 감자(柑子)가 가장 많은 2만5842개다. 다음으로 당유자 4010개, 동정귤 2804개, 유감 2644개, 유자 1460개, 금귤 900개, 청귤 876개, 산귤 828개 등을 올려 보냈다고 써져있다. 다 합치면 8개 품종에 4만개쯤 된다.

‘감귤봉진’의 일부. 감귤을 선별하는 모습과 감귤을 담을 나무상자를 만드는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감귤봉진’은 망경루 앞 뜰에서 조정으로 올려보낼 귤을 선별하고 검사하고 포장하는 그림이다. 수집된 귤을 여인들이 선별하는 모습이 보이고, 그 아래엔 감귤을 담을 나무상자를 제작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감귤은 생과로만 진상된 건 아니었다. 감귤 껍질도 진상품에 포함돼 있다. ‘감귤봉진’ 하단부에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라는 글이 있다. 진피와 청피는 약재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걸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엔 몸이 허해서 열이 날 때 진피를 사용했다는 글이 보인다.

정조는 재위 24년째인 1800년 6월 28일에 세상을 뜬다. 세상을 뜨기 이틀 전이다. 정조는 음식을 먹기도 힘들어했다. 아주 쇠약한 상태였다. 이때 약원(藥院) 신하들이 원기를 보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원기를 보충하셔야 하니, 그런 뒤에야 허열 또한 사라지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사물(四物) 가운데 숙호(熟芐)는 건호(乾芐)로 대체하고 육군자(六君子) 가운데 반하(半夏)를 감하고 팔물탕(八物湯) 가운데 진피(陳皮) 한 가지를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기혈을 강하게 보충하는 약이 아니라 사실 평범하고 떳떳한 왕도(王道)의 약입니다. 오늘부터 복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를 유보시켰다. 진피의 효능을 보지 못한채 정조는 이틀만에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됐다.

어쨌든 감귤은 생과로도, 껍질로도 진상된 제주의 특산품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도엔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과원을 직접 관리했다. 당시 과원은 제주성 안에 동서남북 4개 과원과 중과원, 별과원 등 모두 6개의 감귤원이 존재했다.

제주성 안에 있는 감귤원을 그린 ‘귤림풍악’. 감귤원 주변은 대나무를 심어 방풍 역할을 하고 있다.

‘귤림풍악’은 6개 과원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은 과원 중간에서 이형상 목사가 익어가는 감귤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는 모습임을 확인하게 된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감귤에 색이 칠해져 있다. 감귤원 주변으로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 대나무는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감귤원은 제주성 안의 6개 과원 외에도 지역별로도 존재했다. 기록상으로는 조선시대 최대 41개 과원이 있었다고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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