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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나무가 나면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는데 사실인가?”
“감귤나무가 나면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는데 사실인가?”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6.02.09 10: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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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다시보기] <9> 제주사람들을 힘들게 만든 감귤나무

제주의 대표적 농산물을 들라면 누구나 감귤을 꼽는다. 때문에 정치를 하는 이들은 감귤 정책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을 한다. 더구나 요즘은 개방화시대여서 자칫 농심을 상하게 하는 정책을 과감히 내놓기 힘들 정도이다. 그만큼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감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감귤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첫 기사는 태종 12년(1412)이다. 당시 ‘태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절기마다 나는 생산물을 종묘에 바치는 기록이 나온다.

“시물(時物)을 종묘에 바치는데 2월에는 얼음, 3월에는 고사리, 4월은 송어다. 5월은 보리와 죽순·앵두·살구, 6월은 사과·가지, 7월은 기장과 조, 8월은 은어·벼·밤, 9월은 기러기·대추·배, 10월은 감귤, 11월은 고니, 12월은 물고기와 토끼다.”(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4권, 12년(1412) 8월 8일)

종묘에 바치는 생산물을 잘 들여다보면 “이 지역에서만 나는 것이다”고 콕 짚어서 말할 수 있는 건 감귤이 유일하다. 지금도 감귤은 제주도의 독보적인 생산물이듯, 지금보다 더 추웠을 것으로 예상되는 옛날이야 제주이외의 지역에서 감귤이 나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감귤을 진상하는 내용을 그린 ‘감귤봉진(柑橘封進)’

그런데 감귤을 바다 멀리서 가져오는 수고는 사실상 조선 조정으로서는 불편했다. 그런 고민은 감귤나무 수백그루를 전남 바닷가 지역으로 옮겨 심는 작업을 하게 만든다. 조선 태종 때 2차례나 제주에 있는 감귤나무를 전남 지역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전남지역에 옮겨 놓은 감귤나무에서 감귤을 땄을 리가 없다. 종묘에 바치는 생산물을 좀 더 쉽게 육지부에서 거두어들이려 했으나 감귤은 제주도의 ‘유일’한 것임을 확인할 뿐이었다.

얼마나 귀했으면 감귤을 훔친 이들의 벼슬을 박탈하기까지 했을까. 문종이 즉위한 해는 1450년이다. 그해 환관이던 윤득부와 이용련이 진상을 할 감귤을 훔쳤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이 일어난다.

감귤은 종묘에 올리는 생산품이었고, 그걸 훔친 이들의 벼슬까지 달아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감귤을 만들어내는 곳, 제주에 있던 사람들은 감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곱게 봤을까? 아니다. 감귤은 고통이었다.

찰방의 지위에 있던 김위민이 제주의 오랜 폐단을 글로 써서 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감귤에 대해서 올린 부분만 옮긴다.

“민간에서 과일 나무를 가꾸는 것은 자식들을 위한 것입니다. 관에서는 민간의 과일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 지방관이 감귤 진상을 핑계로 나무를 세어 장부에 기록하고 열매가 맺으면 열매 수를 세어 봉하여 둡니다. 그러다 그 집 주인이 감귤을 따면 절도죄로 몰아대고 전부 관으로 가져갑니다. 백성은 이익을 보지 못하고 서로 원망하고 한탄합니다. 관이 민간으로부터 감귤을 거두는 폐단을 없게 하면 백성들의 원망이 없어질 겁니다. 부득이 민가의 감귤을 진상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 값을 넉넉하게 쳐주게 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모두 심고 가꾸기를 권장하고 원망하는 일이 없어질 겁니다.”(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6권, 9년(1427) 6월 10일)

김위민이 조정에 올린 글을 들여다보면 민간에서 재배한 감귤은 진상품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감귤은 어떻게 서울로 보냈나. 바로 관에서 직접 재배하는 감귤원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관리들은 민간에서 재배하던 감귤을 일일이 관리하며 백성을 못살게 군다. 김위민의 글에 따르면 열매 수까지 셌고, 그게 없어지기라도 하면 곧장 벌로 연결됐다. 그러기에 당시 제주도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리지 못한다.

김위민이 상소한 건 세종 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김위민이 상소한 내용을 곧장 실행하도록 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그렇지 않다. 민가에 있는 감귤나무는 늘 진상품의 대상이었다. 조선조 수백년간 이어온 고질적인 병폐였다.

영조 24년이면 1748년이다. 김위민이 글을 올린 뒤 300년 가까이 된 시점이다. 영조가 제주목사로 있다가 돌아온 한억증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듣건대 감귤을 진상하는 폐단이 있어서 민가에서는 감귤나무가 자라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한다는데, 사실인가?”

제주목사를 지냈던 한억증은 영조의 물음에 다음처럼 답한다.

“그런 폐단이 있습니다. 민가에 감귤나무가 나면 관에서는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열매를 따서 바치게 합니다.”

감귤은 지금은 전 국민이 즐겨찾는 과일이다. 맛은 물론, 영양가도 풍부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 제주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감귤나무를 죽으려 했을까. 다음에도 감귤 이야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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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나무? 2016-02-10 21:06:22
아무리 시대가 다르다지만 감귤나무가 이렇게. 수난을 당했다니ㅠㅠ
오죽했으면 그랬으랴만 모든 건 관리하는 기관이 문제였군요
가슴 아프네요 ㅠㅠ

아니이럴수가? 2016-02-09 11:00:03
아니 이런일이ㅠㅠ 기자님 덕분에 귤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알게됐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