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52 (금)
요리 조리
요리 조리
  • 홍기확
  • 승인 2016.01.12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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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11>

 나는 세상에서 라면을 가장 맛있게 끓인다고 자부한다. 부모님도 라면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끓여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아이도 라면만큼은 아빠가 끓여줘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없어지면 아이에게 아쉬운 이유는 라면 끓여줄 사람이 없다는 정도다. 내가 맛있는 라면에 집착하는 이유는 가정에서 내 존재가치를 빛내기 위한 몸놀림(?)이라고 봐야겠다.

 끓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은 천박한 과학지식을 지닌 내가 알고 있는 액체 중 가장 극적(劇的)인 액체이다. 끓는점은 100도이다. 99도까지는 절대 끓지 않는다. 꼭 100도가 되어야 끊는다. 나는 물의 끓는점을 스프와 야채가루를 면보다 먼저 넣음으로써 끓는점 자체(107.5~108도)를 높인다. 보다 뜨거워진 물은 면을 급속히 익히고 수분흡수를 줄여 꼬들꼬들하게 만들어 준다. 간단한 비법이다. 아이에게는 안 알려줄 것이다.

 며칠 전에는 김치찌개도 끓여보았다. 요즘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라고 하여 시도해 본 것이다. 매립장에서 숙직을 하며 직장 동료에게 끓이는 법을 곁눈으로 배웠다.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물론 밖에 내다 팔면 결코 팔리지 않을 미묘한 맛이다. 아내는 맛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대통령에 출마해서 2표를 얻은 기분이다. 모수자천(毛遂自薦)으로 내가 한 표, 측은함에 아내가 한 표(주리라 믿는다).

 아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이름에서 빨간 홍어무침과 그의 자매품 가오리무침, 에구머니나 아싸 가오리 등이 매번 생각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가오리의 엄마와 아빠의 자녀 작명이 문제다.)의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의 구절은 아내가 밥 먹으러 들어 오냐고 물을 때마다, 집에 혼자 있게 돼 라면을 끓여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글귀다.

 에쿠니 가오리는 9월에 여행을 떠난다고 남편에게 말한다. 양복과 넥타이, 와이셔츠와 양말을 여기저기 벗어던지던 남편이, 옷을 벗다말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말한다.

 “그럼, 밥은?”

 몇 초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간신히 에쿠니 가오리는 말한다.

 “밥? 첫마디가 그거야?”

 에쿠니 가오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존재 가치가 밥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슬펐다. 남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마음속에서 예의 진부한 질문, ‘이 사람, 혹시 밥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아니야?’를 떨쳐내기 어렵다.”
 
 그럼에도 에쿠니 가오리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생각해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요리 조리는 힘들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직장에서의 점심을 제외하고는 예외가 없는 한 삼시세끼를 집에서 먹는 삼식이인 나는 행복하다. 아직까지 라면 끓이기, 10여 년 전 아내의 생일 때 해준 크림 스파게티, 며칠 전 김치찌개를 제외하고는 요리 조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반찬도 사먹지 않고 아내가 다 해준다. 요리 만들기를 좋아한다는(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아내 덕분이다.
 사실 에쿠니 가오리의 말처럼 아내는 요리로 인해 존재가치가 있다. 다른 가치도 있지만, 아이에게도 엄마 없으면 우리는 라면만 먹다 굶어 죽을 거라고 강조한다. 아이가 반찬, 요리 투정을 하면 수저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그날은 굶겨버린다.

 내가 할 줄 아는 요리가 점점 생겨날수록 ‘밥 짓는 아내’의 존재가치는 작아질 것이고, 다른 가치는 점차 커질 것이다. 상대적으로 내 존재가치는 요리 개수의 증가와 더불어 커질 것이다. 아내와의 한판 승부, 제로섬 게임이다.
 
 확실히 밥그릇 싸움은 정치계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서도 이슈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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