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사람은 별개다? 아니죠, 서로 보듬는 존재죠”
“집과 사람은 별개다? 아니죠, 서로 보듬는 존재죠”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12.2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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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16> 김려령의 「요란요란 푸른아파트」
 

지금은 가장 흔한 주거 건축을 들라면 당연히 아파트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파트는 얼마 되지 않은 건축형태이지요. 한창 경제개발이 시작되던 1960년대에 등장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60년도 되지 않았지요. 우리 애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아빠, 무슨 소리예요?”라고 하겠지만, 신석기시대로부터 시작된 주거 형태를 생각한다면 아파트는 그야말로 아기 걸음마 수준도 아닌 것이죠.

아파트의 장점을 들라면 뭐라고 얘기하시겠어요. 당연히 세대별 프라이버시 보호, 관리가 쉽다는 등등을 들 수 있겠지요.

근데 말이죠. 아파트는 왜 그리 비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주에도 서울 못지않게 비싼 아파트가 등장하고 있잖아요. 평당 2000만원에 팔리는 아파트도 등장했고, 최근엔 평당 분양가를 965만원으로 하겠다는 아파트도 나왔어요. 아무리 브랜드, 브랜드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 같아요.

1960년대 아파트가 등장했을 때만하더라도 지금처럼 ‘호화’라는 단어를 달 줄은 전혀 몰랐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삶과는 완전 동떨어진 게 바로 아파트였거든요. 우리는 온돌이라는 기본 구조를 달고 살았어요. 온돌의 기본 구조는 무거운 돌을 바닥에 깔아야 하고, 그런 상태에서 불을 지펴 바닥을 따뜻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 조상들만 가지고 있는 특허권이나 다름없죠. 하지만 구들을 깔아야 하는 온돌문화는 단층에서만 살기에 적합한 구조였어요.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은 근대화하기 전에도 2층이상의 높은 건물을 올려 사람이 살곤 했지만 우린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건 바로 온돌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집합주택을 만들려 했으나 온돌문화에 젖은 우리의 풍토를 쉽사리 바꾸지 못했지요. 그러다 1960년대 개발의 붐을 타고 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한꺼번에 담는 그런 건축물이 필요했던 것이죠. 사실 유럽에서의 아파트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고 해요. 상류층이 사는 공간이 아니거든요. 유럽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깜짝 놀란다고 하잖아요. 유럽인들은 아파트를 우리와는 다르게 인식을 해요. 지금 우리는 아파트를 최상의 가치가 있는 자산으로 보지만, 유럽인들은 그와는 반대이거든요. 그래서 깜짝깜짝 놀라곤 해요.

만일 온돌기술이 연탄 보일러에만 그쳤다면 아파트는 지금과 같은 위세를 떨치지 못했을 거예요. 성공 요인은 보일러 기술의 발달인거죠. 우리 사람들은 따뜻한 바닥을 좋아하는데, 기술 덕에 수십층 높이의 건물에도 따뜻한 보일러를 깔 수 있으니 높이야 상관없다고 보는 것이죠. 만일 지금도 연탄을 쓴다면 고급 아파트는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김려령의 <요란요란 아파트>는 재개발 지구에 들어선 푸른아파트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재개발이라는 단어는 무척 심각하게 들리지만 이 책은 재개발로 인한 문제의 시각을 담기보다는 점차 스러지는 아파트에서 바라본 서민들의 일상을 잘 그려내고 있어요.

주인공으로는 기동이라는 3학년 어린이가 나옵니다. 사실은 4학년이어야 하는데, 9살 때 1학년에 들어가면서 1년을 까먹은 것이죠. 기동이는 아빠와 엄마랑 떨어져 사는 신세가 됩니다. 기동이는 그래서 할머니가 있는 푸른아파트에 맡겨집니다. 그런데 기동이의 말투는 할머니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어요. 너무 건방지거든요. 할머니에게 존댓말이라고는 없습니다. 전학 온 첫날 다른 친구들을 흠씬 두들겨 패는, 어찌 보면 문제아를 닮은 면도 있어요.

그러나 알고 보면 기동이는 정이 많은 아이랍니다. 배가 불룩한 고양이를 향해 소시지를 던져주기도 하고, 고양이 밥도 챙겨주는 친구예요. 기동이처럼 아빠·엄마랑 헤어져 사는 단아라는 친구를 챙겨주기도 하지요.

버릇없던 기동이가 개재발을 앞둔 푸른아파트에 살면서 남으로 칭찬받는 어린이가 됐다는 점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푸른아파트는 40년을 넘긴 곳이죠. 낡은 곳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기동이는 그런 낡은 아파트에 사는 불평을 늘어놓지 않아요. 김려령 작가가 이야기의 흐름을 기동이에게만 맞춘 게 아니라서 그렇지만요.

기동이는 오히려 할머니가 아파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좋아합니다. 할머니가 뭐라고 했냐고요? 할머니의 사투리를 들어보세요.

“집도 죽은 집이 있고, 살아 있는 집이 있어야. 요 아파트는 살아 있는 집이여. 한 번도 사람이 빈 적이 없었다니께. 집은 사람을 보듬어 주고, 사람은 집을 보듬어 주면서 같이 사는 거여.”

건축은 유기체이기도 하다. 바로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서 살기에 그렇다. 그림은 재개발로 인해 철거될 아파트에 대한 할머니의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기동이는 푸른아파트에 1년간 삽니다. 그 사이에 착한 일도 많이 하죠. 그런데 푸른아파트는 재개발로 철거를 앞두게 되고, 기동이도 그 아파트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하죠. ‘집과 사람이 서로 보듬어주는 존재’라는 사실을요. 어떻게 집과 사람이 보듬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과 집이 관계없는 존재라면 ‘보듬다’라는 단어를 쓸 수 없지만, 사람은 집에 들어가서 사는 존재이기에 어떻게든 집이라는 공간과의 연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거든요. 기동이가 그런 사실을 깨달은 건 다름 아니라 ‘기억에 대한 가치’ 때문이죠. 푸른아파트에 살면서 고양이를 보듬어주고, 단아를 챙겨준 기억들이 온존하기에 할머니의 말씀을 잊지 않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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