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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에게 현재 살고 있는 ‘지금’의 중요성을”
“애들에게 현재 살고 있는 ‘지금’의 중요성을”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11.16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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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14> 조성자의 「화장실에서 3년」
 

누구나 혼자 있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아니, 혼자이던 때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쌍둥이를 빼고-가 바로 혼자였죠. 그래서인지 ‘혼자’이고 싶은 행동은 사람에겐 언제나 나타납니다. 아니, 그 ‘혼자’라는 행동은 ‘갇히다’는 말과 뭔가 닮은 것 같네요.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갇혀 살아온 덕에 종종 어린이들은 ‘갇힘’이라는 행동에 익숙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소꿉놀이를 할 때 ‘갇힘’은 빛이 납니다. 책상 밑에 들어가 있기도, 이불이 놓인 벽장에서 놀기도 하죠. 제 머릿속에도 그런 ‘갇힘’의 기억이 선하고, 애들을 키우면서도 “애들은 왜 꽉 막힌 곳에서 놀기만 할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 갇히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종종 사고를 당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간혹 접할 때도 있어요.

제가 집어든 동화는 조성자 작가의 <화장실에서 3년>입니다. 동화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3학년인 차상아라는 어린이죠. 상아는 조용합니다. 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이지요. 친구랑 어울리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질 않아요.

혼자 있고픈 애들은 뭔가 좀 별난 구석이 있어요. 사실 ‘별나다’는 표현이 썩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인 애들은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기를 좋아하죠. 상아도 그래요. 꽃향기에 취해 눈 감고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밤하늘의 별을 본다며 쳐다보고 걸어가다가 역시 넘어집니다. 그 외에도 상아의 특이한 성격은 많아요.

동화 속 사건이 일어난 건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간 날입니다. 상아의 담임 선생님은 “버스에서 큰 일(?)을 보기가 힘드니, 다들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라”고 합니다. 버스에서 하나 둘 내려서 일을 보러 갑니다. 상아도 그 틈에 낍니다. 근데 상아는 그 별난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가방을 둘러맵니다. 상아는 자신이 아끼는 것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죠.

혼자 있기를 즐겨하는 상아가 숲속에서 다람쥐를 따라가는 장면.

상아가 화장실을 제대로 갔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텐데, 그만 다람쥐를 쫓아가다가 일이 발생하죠. 다람쥐를 한참 쫓아가다가 문득 생각난 게 ‘화장실’입니다. 마침 숲속에 화장실이 있군요. 상아가 그 화장실에 들어가 볼 일을 보기 위해 문을 잠그는 순간, 상아는 세상과 격리됩니다. 낡은 화장실의 문은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습니다. 4시간이 흐른 뒤, 상아를 찾으러 모두들 우르르 달려옵니다.

상아가 화장실에 갇혔던 시간은 4시간인데 왜 책의 제목은 ‘3년’일까요. 상아의 머릿속에는 모든 게 ‘3년’이라는 틀에 맞춰져 있답니다. 상아가 1학년일 때 아빠가 집을 나갔어요. 약사인 아빠가 오토바이를 사서 몰고 다니자 엄마는 반대를 합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며 집을 나섭니다. 상아가 아빠에게 ‘언제 올거냐’고 묻자 아빠는 “3년”이라고 답을 합니다. 사실 상아의 아빠는 갇혀 지내야만 하는 약국의 일상을 훌훌 벗어던지려고 오토바이를 산 것인데, 엄마는 그걸 이해해주질 않은거죠.

화장실에 갇혀 있는 상아의 모습.

3년은 또 있습니다. 만화가가 꿈인 상아는 엄마에게 만화를 익힐 수 있는 학원에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3년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상아에겐 또 다른 3년이 생겼어요.

<화장실에서 3년>의 3년은 단순한 숫자의 개념은 아닙니다. 그건 기다림이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빠의 품이 그리운 상아는 숱하게 3년을 세고 있습니다. 화장실에 갇힌 덕분에 아빠를 빨리 볼 수 있게 됐지만요.

다들 ‘품안에 자식’이라고 하죠. 부모의 품을 떠나는 순간, 그 멀어진 거리는 상상할 수 없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자녀간의 스킨십을 많이 해주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빠를 만나는 순간. 기다리는 건 너무 애를 타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제겐 미르와 찬이라는 두 딸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아빠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곤 했는데 이젠 그런 쟁탈전은 없습니다. 처음에 아빠를 차지한 건 큰 딸입니다. 큰 딸은 이제 그 바통을 작은 딸에게 완전 넘겨줬어요. 둘째는 더 이상 바통을 넘겨줄 곳이 없어서인지 아빠 곁에는 아무도 함부로 오지 못하게 합니다. 잠도 무조건 아빠랑 자야 하고, 간혹 엄마와의 스킨십(뽀뽀 정도)이 있는 날이면 난리도 아닙니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뒤죽박죽 돼버렸네요. 우리 어른들은 <화장실에서 3년>처럼 애들을 향해 “기다려”라고 외치지는 않는지요? 엄마·아빠들이 잘 쓰는 말 가운데 “기다려”와 “나중에”가 많을 겁니다. <화장실에서 3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기다려”와 “나중에”라는 말은 많이 쓰는 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요. 이왕이면 이런 말로 바꿔보고 싶네요. “그래?” 혹은 “알았어, 지금”

상아가 그리던 말은 바로 그런 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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