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19:18 (목)
속도전 양상
속도전 양상
  • 홍기확
  • 승인 2015.11.09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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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103>

 아이가 자란다. 나도 자란다.
 아이의 걸음이 빨라진다. 나도 덩달아 빨라진다.
 아이는 커가며 완벽을 추구한다. 나 역시 덩달아 예전에 포기했던 완벽이라는 환상을 다시금 펼친다.
 승부욕이 있는 아이는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좌절한다. 당연한 반응일 터인데, 왜인지 그런 모습이 다 커버린 어른인 나에게는 조급하게 보인다.

 인생이 단 한판의 승부로 끝난다면 모든 것을 내걸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국지전, 공성전, 응원전, 먹걸리에 파전 등 다양한 종류의 전쟁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겪으며, 인생의 평균적 승리를 마지막 순간에 점친다.

 아이는 빨리 걷다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한 오랜만의 산책에 적잖이 흥분했을 터이나, 주된 원인은 나를 이기고자 함이다.
 걸음이 느렸던 아이. 어제 키를 쟀더니 꽤나 자랐다. 키뿐만 아니라 마음도 자랐고, 걸음은 더 빨라졌다. 아이는 내가 가진 생각의 속도보다 더 빨리 자라고 있다. 많은 전쟁 중에서 속도전(速度戰)에 심취해 있다.
 느림보 아빠의 입장에서 아이가 자라는 그때그때 내가 전해주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닌가 걱정이다.

 아이의 숨은 그림을 찾고, 아이가 틀린 그림을 찾는다.
 그림에 젬병인 나에게는 어려운 숙제다. 숨은 그림은 못 찾으면 그만이지만, 적어도 틀린 그림은 찾아주어야 할 텐데. 물론 이마저도 아이가 다른 그림을 그리면 소용없는 일임을 알고 있다.

 최근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창의적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음에 내린 특단이다. 스스로 틀을 정하고 일상을 반복함에 껍질을 깨려는 상징이 필요했다.

 국방부에서 친하게 지내던 대령 형님이 술자리 중, 요즘 머리가 굳어서 염색을 했다고 하자 내게 말한다.

 “내 아들도 대학가더니 머리 노랗게 물들여 왔어. 아들도 그 얘기 하더라. 창의력을 위해 염색했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인마, 노란 머리에서 창의력이 나오나? 하지만 잘했어.’
  이렇게 얘기해줬지.”

 참 좋은 형님이자 아버지다.

 아내는 아이에게도 아빠가 하고 남은 염색약으로 머리를 물들여주겠다고 한다. 아이는 무려 삼일 밤낮을 고민하더니 안 하겠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친구들이 머리가 노랗다고 놀릴까봐라서란다. 소심한 녀석. 하지만 아이는 나중에 아빠의 사진을 보고, 지금의 내 글을 읽고 깨달을 것이다. 왜 아빠가 노랑머리가 되었는지. 다른 사람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기며 어떤 것을 얻으려 했는지.

 예전에는 아이가 사회성이 없는 게 속상했는데, 최근 부쩍 자라며 사회에 동화되는 것이 오히려 못내 아쉽다. 내 아이도 어른이 되어 깊은 사회화와 편견의 벽에 부딪칠 때가 있을 것이다. 내달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여기는 어디지?’하고 숨고르기를 해야 할 때와 조우할 것이다. 그 때 이 글을 읽으며 삶에 파격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도했으면 좋겠다.

 제주도에 여행 온 장인어른이 묻는다.

 “홍서방. 염색했네. 공무원이 머리 염색해도 돼? 아무래도 좀 그렇네.”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속마음으로만 답변했다.

 ‘노란 머리라고 사람이 싹수가 노란 건 아니죠. 하지만 마음가짐은 이미 날라리입니다.’

 아이에게 옳은 것과 틀린 것에 더불어 다른 것을 보여주고 싶다. 아이에게 속도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경치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앞으로만 가는 것보다 가끔을 옆으로 뒤로, 갈지자로 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아이가 자라는 빠른 속도에, 혹여나 부모와 때 이른 이별을 할까 아쉽다는 말도 하고 싶다. 오히려 아이보다는 내가 더 조급한가 보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서귀포시청 공무원 밴드 『메아리』회장 (악기 : 드럼)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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