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따라 숨어있는 보물찾기
금석문 따라 숨어있는 보물찾기
  • 고희범
  • 승인 2015.10.2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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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6회 제주탐방 후기

바위, 돌, 금속 등에 새겨져 있는 문자와 그림 등을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한다. 비석이나 바위절벽에 새겨진 글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당시의 역사와 문화, 인물의 행적 등을 담고 있다. 때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기도 한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 아래 금석문 전문가인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과 함께 숨어있는 제주의 보물을 찾아나섰다.
 
대한독립선언의 현장, 조설대(朝雪臺)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 남쪽에 4.3 당시 불태워져 사라진 마을 '어우늘'이 있다. 이 마을에는  "을사년의 보호조약과 경술년의 치욕을 하루아침에 씻어내어 다시 빛을 되찾기 위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싸워서 나라를 구할 것"을 결의하고 그 뜻을 새긴 '조설대'(朝雪臺)가 있다. 오라동 출신인 이응호(1871-1950)를 비롯해 도내 유림 12인이 집의계(集義契)를 조직하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독립을 선언한 현장이다.

제주의 유림 12인이 대일 항쟁을 결의하면서 집의계를 조직하고 독립을 선언한 조설대. 이들은 바위에 세 글자를 새겨놓았다.  

이들은 이에 앞서 1905년 3월 집의계를 조직하면서 서양과 청나라, 러시아 등 외세와 일본의 침입, 국내 집권세력의 분열과 실정에 항거하고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으로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들은 반만년의 역사를 짊어진 백성으로서 조선의 확고부동한 독립과 수구와 개화 양당의 분쟁과 간신 모리배들의 정치와 외구(外寇), 왜구(倭寇)침입의 분쟁을 의거로 항거하며 충군애국(忠君愛國)과 예의도덕을 만천하 백성들에게 깊이 마음에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하며 왜인을 한 칼에 살육할 것을 대표 이응호는 계원과 더불어 선서한다.”
 
이런 내용은 1987년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대한제국이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상실하게 되는 제1차 한일협약(1904년 8월) 직후 집의계가 결성되고 대일 항쟁을 선언한 셈이 된다. 또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의거문을 발표해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다른 지역에 앞서 제주에서 선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집의계의 선언문과 의거문 원본의 날짜 부분에 가필한 흔적이 발견돼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금석문 전문가 백종진 국장이 소암 현중화의 글씨로 새겨진 비문의 탁본 뜨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집의계광복의사경모비' 

집의계를 주도한 이응호는 제주에 유배온 면암 최익현의 제자 이기온(1834-1886)의 아들이다. 이기온은 면암의 유배가 풀린 뒤 한라산을 유람할 때 길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후 '칠봉서당'(七峰書堂)을 개설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칠봉서당의 훈장으로 초빙됐던 고성겸(1856~1899)은 위정척사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전북 순창 출신 기정진(1798-1879)과 교류했고, 역시 이곳 훈장이던 김시우(1875~1918)의 조카 김장환이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최익현-기정진-집의계-조천만세운동이 연결돼 있다.  
 
이곳 조설대에는 이기온과 관련되는 유적들도 자리하고 있다. 제주MBC 맞은 편에 있던 '문연사'(文淵社)의 유적들이 신제주 개발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최익현이 써준 이기온의 호 '귤암'(橘巖), 최익현이 심은 나무임을 표시하는 '사장수'(師長樹), 유학자들의 상징인 생강밭 '종강포'(種薑圃), 붕어를 키우는 연못 '양부정'(養鮒井) 등의 석각이 있다. 일종의 표지판이다.

조설대에서는 집의계원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한 경모제가 2013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한라산신 사당이 있던 산천단

한라산신제는 탐라국 시절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중요한 나라의 행사였다. 봄과 가을 두 차례 한라산 정상 북벽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눈과 바람 때문에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얼어죽는 일이 발생하자 목사 이약동(1416~1493)이 지금의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으로 장소를 옮기도록 했다. 현재 산천단에는 돌 제단만 있지만 원래는 한라산신을 위한 사당인 '한라산신묘'(漢拏山神廟)가 있었다.

제주목사 이원조가 저술한 <탐라지 초본>에 '한라산신묘는 제주읍성 남문 밖 20리 쯤에 있다'면서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사람들이 많이 얼어죽어 목사 이약동 때에 이곳에 창건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창건'했다는 표현은 돌 제단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이다. 또한 주변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이 발견돼 한라산신묘의 주춧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돌들은 1940년대 홍순녕(1887~1949) 등 일행 4명이 주변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것들을 발견해 한 곳에 모아놓고 그 감회를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 홍순녕은 제주출신으로 첫 중등교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진다. 제주농업학교 교사, 사립 화북교 교장, 제주고등여학교(현 제주여중) 초대 교장을 역임하고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홍순녕 등이 세운 비석은 제주문화원장을 지낸 홍순만이 1978년 근처 샘물가에 두 동강이 난 채 버려져 있던 것을 발굴해 세운 것이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홍순녕은 그의 형이다.

홍순녕 등 4명이 세웠던 비는 두 동강이 난 상태로 다시 세워졌다.(가운데와 오른쪽 비) 4.3의 흔적은 이곳에도 남아있다. 가운데 비석 옆면에 총탄이 그대로 박혀있다. 

한라산신묘를 현재의 산천단으로 옮기도록 한 목사 이약동은 청백리로 이름이 났다.
이약동이 임기가 끝나 제주를 떠날 때 제주에서 난 물건은 모두 두고 한 필의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을 타고 가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말 채찍을 보고 "이것도 이 지방에서 난 물건"이라면서 말을 돌려 채찍을 관아 건물 기둥에 걸어놓고 떠났다.
 
제주를 떠나던 배가 갑자기 바다 한가운데서 빙빙 돌며 나아가지 않았다. 이약동이 "우리 일행 중에 섬 물건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한 비장이 "사또께 직접 드리면 받지 않을 것이어서 제주를 떠난 뒤에 드리라고 제주인들이 선물한 포갑(鮑甲)을 받은 것이 있다"고 답했다. 포갑을 꺼내 바다에 던지자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포갑은 전복껍데기로 만든 세수대야라는 주장과 갑옷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선시대 공연관람 귀빈석, 관나암(觀儺岩) 
 
한라산 돈내코 근처의 서귀포산업과학고 맞은편 효돈천 냇가 바위에는 가로 세로 10cm 크기의 글자로 '관나암'(觀儺岩)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목사 이원조의 <탐라지 초본>의 기록에 따라 지난 2000년 제주의 한학자 오문복 선생이 발견한 것이다. 관나암 근처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오가는 관리들의 숙소였던 영천관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영천사가 있었다. 영천관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국립목장인 10소장 가운데 9소장의 말 숫자를 확인하던 점마처(點馬處)로도 사용되었다.

바위에 새겨진 관나암 각자는 얼핏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오문복 선생이 사흘동안 이 일대를 뒤진 끝에 찾아냈다.

관나암이라는 글자를 영천사의 승려가 새겼다는 기록(이원조 <탐라지 초본>)과 관나암의 뜻이 공연에 해당하는 '나례(儺禮)를 관람하는 바위'라는 점으로 미루어 목사가 점마를 하거나 어사가 민심을 살피기 위해 순력을 할 때 영천사의 승려들이 승무와 범패 연주로 연희를 베풀었을 것으로 보인다. 관나암 맞은 편 냇가의 지형이 주변의 다른 곳과 달리 평평하게 정돈된 것을 보면 이곳이 무대였을지도 모른다. 울창한 숲은 그 뒤에 생겨난 것일 터이다.

관나암 맞은편 냇가 둔덕. 10여m가 평평하게 정돈돼 있고 아래쪽에는 돌을 쌓아 단을 만든 것 같은 흔적이 있다.

이곳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관나암에서 300여m 아래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절벽 아래에 작은 못이 있다. '예기소'(藝妓沼)다. <탐라지 초본>에 기록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한 절제사가 말을 점검할 때, 나무를 가로 질러 놓아서 다리를 만들고 자리를 깔아서 음악을 연주하며 기녀로 하여금 그 위에서 검무(劍舞)을 추게 하였는데, 한 기녀가 몸을 뒤집다가 연못으로 떨어져 죽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관나암 바위를 제외하고 영천관도 영천사도 지금은 아무 흔적이 없다. 절 터에는 대나무숲만 무성하다.

영주산 신선들의 솥, 정소암(鼎沼岩)
 
표선면 성읍리 영주산 서쪽 기슭을 따라 흐르는 천미천에는 '영주산의 신선들이 북쪽에 이웃한 백약이오름에서 약초를 캐다가 불로장생약이라는 단약(丹藥)을 달인 솥'이 있다. 굴곡이 심한 바위투성이 건천 한 복판에 사철 마르지 않는 소(沼)가 있으니 그 이름이 정소암이다. 솥처럼 둥그렇게 파인 곳에 항상 물이 있어 신선들이 산다는 영주산과 온갖 약초가 풍성한 백약이오름과 연결되면서 이런 전설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소암. 이 근처에 '단약을 끓이는 곳'이라는 뜻의 '연단대'(煉丹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구전돼 왔으나 찾을 수 없다.

영주산은 원래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었다. 봉래산 방장산과 함께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로 꼽혔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을 보낸 곳도 영주산인 한라산이었다. 그러나 이곳 성읍리의 영주산도 신령한 산으로 인식되면서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탐라지>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 정의현을 성읍리에 두면서 영주산을 주산으로 삼았다.(위키백과)
 
곳곳에 크고 작은 물웅덩이가 있는 이곳에는 바위 절벽과 널찍하게 펼쳐진 바위도 많아 꽃놀이를 하기도 좋다. 방선문이 제주목사의 꽃놀이 장소라면 정의현감에게는 정소암이 적당했다. 음력 3월 3일이 되면 정의현감을 비롯해 관속과 육방 하인, 일반 주민들까지 참석해 정소암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졌다고 한다. 이를 ‘정소암 화전놀이’라 한다.
 
사람들은 솥단지를 걸머지고 가서 밥을 하고 떡을 해 먹으며 하루 종일 춤추며 놀았다. 향교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풍월을 다투었고, 기생들은 '신목사타령' '사랑가' 등 노래를 부르고, 사령들은 비명에 죽은 죄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칼춤을 추었다. 지방의 양반들은 현감에게 어려운 일을 진정하기도 했다. 이 날만은 백성이 관리에 대해서 얼마쯤 불경한 태도를 보여도 벌주지 않았다고 한다. (진성기 <제주도민속>)
 
도대, 그 이름의 유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바닷가에 2m 높이의 축조물이 있다. 도내 해안가에 서 있는 연대(煙臺)와 흡사하지만 그 기능은 전혀 다른 도대다. 연대는 외적의 침입을 연기를 내어 알리는 것이고, 도대는 마을에서 바다로 나간 배가 들어올 때까지 고기기름 등을 이용해 불을 밝히는 시설이다. 이 축조물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세워졌다.

도내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북촌리 도대는 일제가 세운 것이다. 우리 것이 아니라는 부끄러움도 우리가 간직할 유산이다.

도대 위에 서 있는 작은 비석에는 '어즉위기념등명대'(御卽位記念燈明臺)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 연호인 '대정 4년 12월 건설'이라고 축조 시기도 밝혀놓았다. 일본 왕 타이쇼(大正)가 즉위한 것을 기념해 등불을 밝히는 대를 세웠다는 것이다. 제주도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산지항의 등대 보다 1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등명대는 백종진 국장이 제주시 도두동과 삼양동에서 같은 내용이 새겨진 비를 발견하면서 일제에 의해 도내 여러 곳에 동시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됐다. 백 국장은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도대라는 이름은 등대의 일본어인 '도다이'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지배의 잔재임에 분명하다.  
 
옛 제주인들이 비석이나 암벽에 새겨놓은 몇개의 글자는 이 섬에서 벌어진 일들을 묵묵히 증언한다. 이들 금석문은 오랜 세월 풍상을 견디고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도 하고 우리 조상들이 품고 있던 꿈을 전해주기도 한다. 때로는 신앙양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치욕의 기억마저 고스란히 보여주기도 한다.
 
요즘 역사 국정교과서 논란이 한창이다. 역사는 자랑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오늘에 주는 의미를 되새기는 데서 발전의 씨앗이 된다. 치욕의 역사 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권력이 역사를 미화하는 일이다.

 

고희범의 제주 이야기

고희범 객원필진 <미디어제주>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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