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4:28 (화)
“문제아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 아닌 우리 사회”
“문제아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 아닌 우리 사회”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10.16 15: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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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훈의 동화속 아이들] <12> 박기범의 「문제아」
 

‘낙인’이라는 게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비에게 형벌을 내리면서, 아니 양반들이 자신이 지닌 노비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지요. 그걸 흔히 ‘낙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낙인’이라는 말이 그다지 좋은 뜻으로 쓰이지는 않아요. 이렇게 말을 하죠. ‘낙인찍다’라고요. 그 말은 어떤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고착화됐다는 의미입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 ‘낙인’ 때문에 수십년간 피해를 입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4.3’이라는 올가미가 있습니다. ‘4.3’은 제주도 전체를 ‘빨갱이’라는 색으로 입혔습니다. 그야말로 ‘낙인’이죠. 제주도 전체가 그런 미움을 받은 것과 함께 제주도내에서도 산군(山軍)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연좌제’의 혹독한 그물망에 갇혀 있던 이들이 숱합니다.

제 가족도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제 아버지는 군 생활을 하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원칙대로만 하는 아버지를 향해 어떤 군인이 이런 말을 했다네요. “제주도 사람들은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요. 결국은 아버지의 색깔이 드러나고 맙니다. 보직을 받지 못한-아마 ‘대기발령’쯤 된 것 같아요-아버지는 그래도 줄기차게 출근투쟁을 하면서 일을 했답니다. 그걸 지켜보던 윗분이 열심히 일을 하는 아버지를 챙겨줬다고 하네요. 그러나 ‘연좌제’는 끝나지 않았답니다. 알게 모르게 아버지 곁에 머무는 게 연좌제였어요.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한 후에도 모 기관에 끌려간 적도 있답니다. 그 놈의 연좌제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이들은 4.3이후 수십년을 떵떵거리고 살잖아요. 참, 세상이 야속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도 그런 것이잖아요. 교학사가 펴낸 교과서를 제외한 나머지 교과서를 ‘좌편향’이라면서 낙인을 찍잖아요. 역사학자 대부분이 반대를 하는데도 좌편향이라고 낙인을 찍고야 마는 그런 사회입니다.

박기범의 <문제아>도 ‘낙인’을 거론합니다. 그건 바로 평범하게 잘 지내던 초등학생을 ‘문제아’라고 부르면서 <문제아>의 주인공 자신도 모르게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비에게 한 번 찍힌 ‘낙인’이 지워지지 않듯, 산군(山軍)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의 그늘을 늘 안고 있다는 사실은 ‘낙인’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문제아> 속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6학년 하창수입니다. 그러나 창수는 창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질 않습니다. 그냥 ‘문제아’입니다. 창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아가 되어 버립니다. 5학년 때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참다못해 의자로 무자비하게 내려친 사건 이후 그는 ‘문제아’가 됩니다. 알고 보면 창수는 피해자인데,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피해를 떠안아야 합니다.

창수의 엄마는 오래전 병으로 돌아가셨고요, 곁에는 도배일을 하는 아빠와 할머니만 있답니다. 그런 가정이어서인지 창수의 5학년 담임은 창수를 선입견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다 그 사건이 터졌고, 담임 선생님은 이후 그를 ‘문제아’로 불렀죠. 창수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나는 문제아다. 선생님이 문제아라니까 나는 문제아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 말할까요. 창수는 6학년이 되기를 바랐어요. 이유는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면 그에게 ‘낙인’이 된 ‘문제아’를 벗어던지고 보통아이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창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마치 '문제아'를 들여다보듯 한다. 그런 문제아는 사회가 만들고 있다.

그러나 ‘문제아’ 창수의 꿈은 무참히 깨지고 맙니다. 6학년 담임의 첫 마디는 창수의 기대를 모두 허물어버립니다. “네가 그렇게 유명한 하창수냐? 5학년 때는 여자 선생님이라서 네 멋대로였지만,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사고만 쳐 봐. 용서 없는 줄 알아.” 이렇게 창수의 꿈은 깨집니다. 보통아이로 살겠다던 창수는 여전히 ‘문제아’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요. 창수의 독백을 더 들어보죠.

“나는 나를 문제아로 보는 사람한테는 영원히 문제아로만 있게 될 거다. 아무도 그걸 모른다. 내가 왜 문제아가 되었는지, 나를 보통아이들처럼 대해 주면 나도 아주 평범한 보통 애라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 곁에는 창수를 닮은 문제아가 숱하게 많을 거예요. 자신이 보기엔 ‘문제아’가 아닌데 ‘문제아’를 만들어내는 세상이 아닌가 하네요. 학교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언론에서 하도 들쑤셔대니 어떤 때는 세상의 모든 학생들이 ‘문제아’로 인식될 정도였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문제아’를 만드는 건 <문제아>의 창수의 경우를 보듯, 자신이 아닌 주변에서 그러잖아요.

혹여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잘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을 ‘문제아’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선 제 자신부터 반성을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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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니얼 2015-11-07 22:46:53
모든 성인들이 청소년의 바른 성장을 저해하지는 않지만 공감 가는 부분도 있네요... 인권은 최선으로 존중되야 하기에...

이유를 아는 자세로 2015-10-16 22:51:17
어떠한 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강하던 약하던 반대 또는 반박하는 사람을 문제있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게 지적하는 본질을 호도하려는 자기 방어적인 행위가 아닌지...어떤 행동에 대해 문제아 처럼 만들지 말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우리 모두의 긍정적인 올바른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