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만세운동 14인의 동지들, 여전한 ‘좌익의 굴레’”
“조천만세운동 14인의 동지들, 여전한 ‘좌익의 굴레’”
  • 홍석준 기자
  • 승인 2015.08.14 12: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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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광복 70주년 ②유생들 주도, 제주 항일운동으로 이어져
조천만세동산에 세워져 있는 3.1만세운동 기념탑.

제주의병항쟁, 법정사 항일운동, 해녀항일운동과 함께 대표적인 제주 지역의 항일운동으로 꼽히는 것이 조천만세운동이다.

조천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연속적으로 조천리와 함덕리, 신흥리, 신촌리등 4개 마을에서 전개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분과 직업, 연령, 성별에 관계 없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 운동으로 전개된 조천만세운동은 제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고취시키고 이후 다양한 항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는 분기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목할 점은 조천만세운동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3.1 운동과 달리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 중 유생들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조천만세운동의 발단은 당시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조천 출신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갖고 제주로 들어오면서 구체화됐다.

동료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던 김장환은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색출 작업이 시작되고 3월 12일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귀향을 결심, 제주로 돌아오게 된다.

조카 김장환과 함께 조천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시범. 4.3희생자로 등록됐다는 이유로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장환이 귀향과 동시에 서울의 3.1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보여준 이들은 그의 숙부인 김시범과 당숙인 김시은이었다.

한말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최익현의 제자인 김희정의 문하생이었던 김시범이 조카 김장환과 함께 만세시위라는 거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후 뜻을 함께 할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한 이들은 김용찬, 고재륜, 김형배, 황진식, 김경희, 김필원, 김희수, 이문천, 박두규 등을 끌어들였다. 이어 3월 19일까지 김년배와 백응선이 규합하면서 모두 14인의 동지들이 뭉치게 됐다.

이들 중 김형배는 대형 태극기 제작 책임을 맡았고 김시범과 김형배, 백응선 등은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만드는 작업을 담당하게 됐다.

이들 14명 중 김시은은 대통령표창(1983년)과 애족장(1990년)을, 백응선은 건국포장(1992), 교사였던 박두규는 애족장(2008년)을 받는 등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추서됐지만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

사실상 조천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독립선언서를 갖고 들어와 불씨를 지핀 김장환의 경우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하면서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그어진 후 남한으로 내려오지 못해 월북자가 됐고, 김시범은 4.3희생자로 신고가 됐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월북자가 된 김장환의 경우는 논외로 하더라도, 김시범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유족들의 독립유공자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보훈 당국이 4.3을 여전히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다.

이들 유족들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야말로 후대에까지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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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움 2015-08-14 17:44:01
숭고한 분들을 제대로 모셔야
나라를 위한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갖도록 만드는 것인데~~
안타깝네요 ㅠㅠ 하루속히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맏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