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름비에서 막숙까지
어름비에서 막숙까지
  • 고희범
  • 승인 2015.07.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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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3회 제주탐방 후기

제9호 태풍 찬홈이 북상중이던 날 우리는 몽골지배 10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현장을 찾아 길을 떠났다. 고려군이 '목호의 난'을 진압한 과정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번 탐방은 '어름비에서 막숙까지 - 목호의 난, 그 흔적을 찾아'라는 주제로 지난 2010년 10월에 있었던 제4회 제주탐방을 재기획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배를 타고 목호세력 지도부가 피신했된 범섬을 둘러보는 여정도 포함돼 있었으나 태풍주의보로 이 계획은 진행되지 못했다.

몽골에 친숙해진 탐라인들

탐라에 진입한 삼별초가 고려 원종 14년(1273년) 여몽연합군에 패하면서 원나라는 탐라에 군사 500명을 주둔시키고 직할령으로 삼는다. 이후 몽골의 탐라 지배는 100년 동안 계속된다. 공민왕 23년(1374년) 군선 314척에 당시 탐라 인구와 맞먹을 규모인 2만5605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제주에 온 최영은 명월포(한림읍 옹포리)에 도착한다. 고려군은 11척의 군선에서 내린 1진이 기세등등한 목호세력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는다. 군사들이 두려워 배를 내리지 못하자 최영은 하급 장수 하나의 목을 베며 전투를 독려한다.

기병 3천여명으로 꾸려진 목호군은 최영의 본진이 배에서 내리면서 밀리기 시작한다. 최영은 어름비평원(애월읍 어음리), 연래(서귀포시 예래동), 홍로(서귀포시 서홍동)를 거쳐 범섬으로 숨어들어간 지도부를 쫓아 서귀포시 법환동 앞 바다까지 추격한다.

애월읍 어음리, 봉성리 지경의 새별오름과 이달오름, 촛대봉 앞에 펼쳐진 어름비평원. 명월포에서 고려군에 밀린 목호세력은 기마전에 유리한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명월포에 도착한 고려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100년의 세월 동안 몽골인들을 친숙한 존재로 여기게 된 탐라인들이 대체로 목호들의 지지세력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민왕 대에 들어 반원정책을 펴면서 탐라 관할권을 두고 몇차례 고려와 목호들 간의 충돌이 빚어졌으나 번번히 밀려난 것은 고려였다.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가 네명이나 목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군선 100여척을 보내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한 전례도 있었다.

목호세력은 이미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던 상당수의 몽골인 뿐 아니라 이들과 탐라여인들 사이에 태어나 반(半)몽골인화한 탐라민을 포함한다. 거기다 목호들은 자신들과 함께 살면서 말을 키우는 기술을 전해준 반면, 고려 관리의 지독한 가렴주구를 경험한 탐라인들에게는 고려 보다는 몽골이 더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몽골인 후손들의 수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도내 44개 성씨 중 본을 '원'(元)과 '운남'(雲南, 베트남)으로 하는 성씨가 14개로 나타나 있다. 운남을 본으로 하는 4개 성씨는 원이 망한 뒤 명이 탐라로 유배 보낸 원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제주는 그 이전부터 국가적인 말 수요의 상당량을 채울 만큼 말 사육이 번성했다. 제주가 천연적인 말 방목지로 최적임을 확인한 몽골은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고 난 뒤 충렬왕 2년(1276년) 본국에서 말 160마리를 들여와 제주 동부 수산평에 풀어놓았다. 말 번식이 잘 되자 몽골은 사육시설과 목축기술자 '목호'(牧胡)를 크게 늘려 동쪽에는 수산평에 동아막(東阿幕), 서쪽에는 고산 일대에 서아막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제주의 환경에 맞게 우마를 사육하는 제주의 목축기술과 몽골의 기술이 합쳐지면서 "말이 크게 번식해 산야에 가득했다"고 할 정도로 늘어났다. (김일우 <고려시대 제주사회의 변화>)

원의 말 사육은 제주의 산업구조도 바꿔놓았다. <고려사>의 고려 문종 12년(1058년) 기록에는 '탐라는 지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고기잡이와 배 타는 것으로 생계를 도모하고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조선 세종 7년(1425년)의 <세종실록>은 '제주인들은 말을 팔아서 입고 먹는 자본을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 지배기의 제주목장은 말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자연히 인구도 늘게 됐다.

<고려사>의 고려 원종 15년(1273년) 기록에는 탐라 인구가 1만223명으로 나와 있다. 이 시기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진압된 직후로 탐라인들이 진압과정에서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혀간 상황을 고려하면 원래 인구가 이 보다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렬왕 26년(1300년) 탐라지역의 행정단위가 제주목을 중심으로 동서로 15개 현으로 분화 확대된 것은 몽골의 탐라 국립목장 때문에 경제력과 인구 규모가 커진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일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변화>)

몽골 지배 100년을 거치고 고려가 망한 뒤 조선 초기 세종 16년(1436년) 제주의 인구는 6만3474명으로 나타났다. 조선 건국 후에 정치적 망명자들이나 군역을 피하던 승려, 범죄자, 원나라 유민 등의 숫자가 더해져 이런 규모가 됐다 하더라도 고려말의 탐라 인구가 5만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50여년 사이의 인구증가폭은 엄청나다. 이는 말 사육과 교역 등 말 산업의 발전에 따른 인구 유입의 영향으로 봐야 한다. 말 가격은 조선초기 좋은 말 한 필이 노비 3명 정도의 가격이었으니 말 교역이 제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말 사육은 물론 말 교역까지 중앙정부가 장악하면서 제주의 기간산업은 붕괴의 길을 걷게 된다. 세종 대에 이르러 말가죽, 육포, 힘줄, 말총 등 말 가공품의 거래마저 강력하게 금지함으로써 제주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제주인은 섬을 떠나 유랑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영권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범섬으로 들어간 지도부

최영의 군대에 쫓겨 목호세력의 지도부가 피신한 범섬. 태풍의 찬홈의 영향으로 거센 파도가 일고 있다.

목호군 지도부와 수십명의 군사가 범섬으로 들어가자 최영은 범섬 앞 법환포구에 막숙을 설치한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천혜의 요새인 범섬에는 샘이 있어 지도부와 몽골군사들이 최영 군대와 대치할 만했다. 하지만 버티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최영은 군선 40여척을 줄로 묶어 범섬까지 닿게 한 뒤 범섬에 오른다. 지도부 2명은 벼랑 아래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우두머리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는 처자식과 함께 붙잡혀 목이 잘린다.

2만이 넘는 군사에 쫓겨 달아난 목호군 지도부는 범섬을 마지막 결전을 수행할 곳으로 판단했을까? 그러기에는 기마전에 익숙한 목호군이 지름이 500여m에 불과한 바위섬으로 들어간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급한 대로 몸을 숨기기 위해 범섬을 택한 것이었을까? 목숨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법환포구에서 배를 타고 범섬으로 갈 것이 아니라 해류를 따라 규슈쪽으로 달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최영의 목호 토벌이 있은 지 6년 뒤인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전선 500척을 끌고 들어와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죽은 시체는 산야를 덮었고 그들의 선박으로 운반하면서 땅에 떨어진 쌀이 한 자 길이나 쌓였다. 지나는 곳마다 피가 물결쳤다. 붙잡힌 2~3세 되는 계집아이는 머리가 깎이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고 쌀과 술을 함께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었다. 삼도 연안의 땅이 텅 비었는데 왜구의 침략으로 이렇게 혹독한 적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승승장구하는 왜구를 쫓아 이성계가 나선다. 이성계가 황산(지금의 논산)에 이르렀을 때 한 적장이 나타난다. 나이 15~16세에 외모가 출중하고 사납고 날쌘데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그가 향하는 곳마다 고려의 군사들이 모두 쓰러진다. 군사들은 그를 '아기바톨'(阿其拔都)이라고 부르면서 피하기 바빴다. 아기바톨은 갑옷에 얼굴과 목을 모두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어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활을 쏘아 투구를 떨어뜨린 사이 이지란이 화살로 얼굴을 쏘아 쓰러뜨린다. 이성계 군의 공격으로 선봉이 모두 쓰러지자 적들은 소떼의 울음과도 같은 소리로 통곡했다.

제주출신 역사학자 김인호는 <한국 제주 역사·문화 뿌리학>에서 모든 역사서가 '홍안의 미소년 왜장'이라고 기록한 아기바톨을 '왜장이 아닌 제주도 태생의 몽골계 소년 장수'라고 단언한다.

그 근거로 △ 왜장들은 앞면 양쪽에 뿔 처럼 생긴 투구를 쓰지만 아기바톨이 쓴 꼭지 달린 투구는 몽골식이었고 △ 사람을 제물로 승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대 북방 기마유마민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것이었으며 △ 왜구는 보병 밖에 없는데 아기바톨이 죽은 뒤 적군이 버리고 달아난 말이 1천6백여필로 대규모 기마군단이었고 △ 왜구들은 흐느끼듯 우는 것이 특징인데 군중이 일제히 소리내어 울었다는 점 △ 우리쪽 군사들이 그를 보고 아기바톨이라고 하면서 피했다는 것으로 우리 말의 '아기'와 몽골어로 '용사'를 의미하는 '바토르'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김인호는 또한 1천필이 넘는 말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제주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들어 아기바톨이 이끌었던 군사가 제주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기바톨이 제주 태생의 몽골계 소년 장수라면 목호군의 우두머리 석질리필사가 범섬에서 최영의 군대와 대치하는 사이 몽골의 주요인물들이 1천5백여필의 말과 함께 제주도를 빠져나간 것은 아닐까? 몽골이 말 수송에 이용했던 포구인 표선의 당케와 중문의 당포(대포)를 통해 달아났던 몽골인들이 6년 뒤 왜구와 합세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원 왕실의 원찰 법화사

원의 쿠빌라이는 제주 서남부해안에 관심이 있었다. 일본과 남송을 정벌하는 데 필요한 바닷길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제주에 관심을 두고 있던 몽골은 고려와 함께 삼별초를 평정하고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은 뒤 제주 경영을 더 효과적으로 도모하기 위해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중창에 나선다. 지난 1992년 부터 1997년까지 진행된 법화사 터 발굴조사에서 쿠빌라이가 재위하던 지원(至元) 6년, 고려의 연표로는 원종 10년(1269년)부터 지원 16년, 고려 충렬왕 5년(1279년)까지 중창을 한 것으로 새겨진 명문기와가 발굴됐다. 용과 봉황 무늬가 새겨진 막새도 발굴됐는데 몽골 콩두미 궁전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한 유형의 것이었다.

법화사 터에서 발굴된 지름 65㎝의 주초석.
 

법화사에는 조선시대 들어 명나라에서 가져 간 미타삼존동불도 안치돼 있었다. 중창 이후 법화사는 원 왕실의 원찰이면서 탐라에 살던 몽골인들이 찾아왔던 종교적 안식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화사는 수산평의 동아막과 고산의 서아막 사이 중간지점에 있으면서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호국불교를 내세운 고려와 원의 국가적 입장이 중첩된 국제적 사찰로서 위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김일우)

우리의 탐방을 안내한 김일우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은 최영의 목호 토벌과 관련해 흔히 '목호의 난'이라고 불리고 있으나 국가와 제주라는 양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때 '고려와 제주목호의 충돌'로 이름짓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고려가 탐라의 몽골 잔존세력 때문에 명나라의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국가권력의 고민과 탐라인의 희생이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취지다. 목호 토벌은 몽골의 탐라 지배 100년의 종지부를 찍은 국가사적 사건이다. 동시에 "목호에 붙은 사람은 다 죽여라"는 최영의 명에 따라 탐라인들의 희생은 매우 컸으며 "우리 동족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가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는 40년 후 한 목격자의 증언대로 탐라인들에게 고려군은 또 다른 학살자였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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