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어느 날에
비, 어느 날에
  • 홍기확
  • 승인 2015.07.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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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92>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운전해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가 내릴 때가 그렇고,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운전해 가는 것도 그렇다. 비가 올 때 차 안에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좋다. 안개로 뒤덮인 산길의 명쾌한 공기는 더 좋다.

 비가 억수로 오는 날. 비 오는 날. 비, 어느 날이다. 아내와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산책을 가기로 한다. 광화문. 비는 쏟아지고 차의 와이퍼는 삐그덕삐그덕, 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차를 세우고 꾸역꾸역 커피숍에 들어간다. 겨우 수 십 미터 가는데 온몸이 흠뻑 젖었다. 카페 안은 역시나 폭우로 인해 사람이 없다. 좋은 음악이 흐르고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돌아왔다. 흔히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데이트라 한다.

 데이트란 이런 것이구나! 지금까지 데이트 중 최고다!

 대학교 캠퍼스.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럭저럭 추적추적 내리는 비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장대 같은 남자 교수님이 갈대 같은 한국인 여자 교수님에게 우산을 씌어준다. 보기에도 조그마한 우산은 둘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정장 차림의 흑인 교수님은 아예 조그마한 한국교수님의 머리위로 우산을 기울인다. 당연히 정장의 절반은 금세 흠뻑 젖었다.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점차 온몸이 젖어감에도 교수님의 얼굴은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신사란 이런 사람이구나! 비 오는 날의 가장 멋진 남자다!

 지금도 비는 내린다. 이슬비가 오는 날이다. 오름을 질퍽질퍽 오른다. 가늘어진 빗방울은 금세 그쳤는지, 우울한 습기는 청량한 안개로 바뀌었다. 바람이 분다. 아이를 뒤에서 안고 눈은 감으라고 한다. 딱히 말을 안 들을 이유가 없는 아이는 눈을 감는다. 바람의 노래를 들으라고 한다. 아이는 바람의 노래를 얻는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한다. 눈을 감고 심심했던 아이는 역시나 시키는 대로 따른다.

 나는 부연설명을 한다. 아빠는 산에서 누워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를 가장 좋아하노라고. 다음으로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눈을 감은 후 들리는 온갖 소리를 좋아하노라고. 마지막으로 이처럼 바람의 노래를 듣는 걸 퍽이나 즐긴다고.
 
 날이 맑아졌다. 햇살이 반짝인다. 바다는 차분하게 흐르고, 햇살은 바다를 비추어 수천만 마리의 물고기가 춤을 추는 듯하다. 바람 한 방에 물고기들은 미친 듯 날뛰어 정신적 멀미를 일으킨다.

 비는 언제든 다시 올 것이다. 비가 오지 않고 계속 맑으면 사막이 된다. 비가 오면 세상의 절반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절반쯤은 보인다. 비 오는 날은 혼자 오지 않는다. 구름이라는 단서를 미리 주고, 먹구름이라는 복선을 깔아 준다. 비 오는 날. 활발했던 삶을 멈추게 한다. 어느 날의 기억들을, 잊고 있던 어느 것들을 들추어내기 좋은 날이다.

 오늘은 기필코 막걸리를 마실 테다. 비 오는 날에 대한 예우이자 경배다. 막걸리를 마시고, 책장을 넘기며,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면 잊고 있던 내 삶의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비, 어느 날. 잊고 있었던 삶의 반대편을 찾기에 좋은, 어느 날이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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