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걸음이 느린 아이 두 번째 이야기
걸음이 느린 아이 두 번째 이야기
  • 홍기확
  • 승인 2015.06.22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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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87>

 추억을 추억한다.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혼자 있으면 온 우주가 내 것 같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내 공간 안에 속해 있는 듯한 느낌. 이게 좋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렸다는 것이 어색하다. 여름철에 겨울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과 같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이자 아버지다.

 친구가 많지도 않다. 친한 친구는 두 명 정도. 대학교 때 각종 모임, 학회의 회장을 맡으며 여러 명의 친구와 선후배를 얻었다. 여러 개의 직장을 경험하며 수많은 동료도 얻었다. 하지만 잃기도 했고, 스스로 버리기도 했다. 지금은 그때그때의 소중한 사람 몇몇만 연락을 취한다.
 이런 내가 가장으로써 크고 작은 일을 챙긴다는 것이 우습다. 세상에 십 원짜리 동전을 던지며, 천 원짜리 지폐로 바꿔달라는 것과 같다. 감당이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나는 이중인격자보다 더한 ‘다중인격자’다.

 하지만 정신병이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 누구나 이중인격 내지는 다중인격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은 변한다. 일분 일초 사이에도 변한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은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로 이를 표현한다. 성격(character), 인격(personality)과 다른 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으로 ‘가면’이라는 뜻이다. 융의 정의에 따르면 페르소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외적 인격’, 자신의 성격과 다를 수 있는 ‘가면으로 가려진 인격’을 말한다.

 나는 몇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을까?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나.
 하지만 직장에서는 초특급 울트라 캡숑 활발하고 긍정적이다. 가끔 동료들에게 휴가를 내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혼자 논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 사실 조용한 성격이라는 말을 하면 다시금 놀란다.
 단체 모임에 가면 조용해진다. 모임의 장이나 총무 등을 여러 개 맡았지만,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아직도 스트레스가 여간 큰 게 아니다. 가장 싫은 장소는 결혼식과 장례식장. 사람이 많은 음식점도 피한다. 놀이공원도 싫다. 아무튼 사람이 많은 건 다 싫다. 모임에서도 스트레스를 다스리느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칠 뿐, 속으로는 언제 끝나나 시계만 쳐다본다.
 부모님이나 친척의 모임에는 기쁨조가 된다. 극단적으로 오버하고 장중을 이끈다. 친척들은 내가 오지 않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재미가 없다고 한다.
 집에서는 또다시 말이 없어진다. 보통은 아내나 아이의 말을 듣고 맞장구를 쳐줄 뿐이다. 농담도 여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친한 사람들과 모이면 오버하고, 낮선 사람들과 모이면 그 분위기에 맞추고, 높은 사람들에게는 낮추고, 낮은 사람들에게는 훈계한다.
 
 이렇듯 내 페르소나는 아마도 수 십 개가 될 것이다.

 결국 문제의 원인이 밝혀졌다.  나의 추억을 추억해보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혔다.
 아이는 자신만의 페르소나를 창조할 만큼 여물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인격, 성격만 가지고 있는 상태다. 이 성격이 원초적인 어릴 적 나를 닮았다. 조용한 걸 좋아하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한다. 대인기피증은 아니더라도 사람이 많은 장소를 싫어하고, 사람을 고르며, 친하지 않으면 함께 하려 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느린 아이, 소심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아이를 상대한 표준적이고 전형적인 나만의 페르소나를 창조해 내지 못했다. 어떤 때는 자상한 아빠, 어떤 때는 무관심한 아빠, 어떤 때는 폭력적인 아빠, 어떤 때는 잔소리하는 아빠.
 내가 혼란스럽다면 아이는 내 혼란의 세제곱만큼이나 더 혼란스러울 것이다.

 성격은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인격은, 페르소나는 만들 수 있다. 가면은 쓸 수도 벗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아이를 위한 가면을 만들고 있는 셈이 된다.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부를 일이 생긴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면 노래를 부를 일이 더 많이 생긴다.
 노래를 부를 일이 늘어나면 노래를 연습해야 한다.
 노래를 연습하다보면 노래를 잘 하게 된다.

 나는 가수다.
 아이와 노래를 부를 일은 이미 오래전에 생겼다.
 지금은 아이와 듀엣으로 부르기 위한 노래를 연습중이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저서 :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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