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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지훈(一經之訓) 이야기
일경지훈(一經之訓) 이야기
  • 양태영
  • 승인 2015.06.09 11: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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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영의 시사고전] <10>

遺子黃金滿贏,不如教子一經
유자황금만영,불여교자일경

‘자식에게 황금을 한 바구니 가득 남겨주는 것이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遺子黃金滿贏,不如教子一經)’는 말은 한(漢)나라 때 학자이자 정치가인 위현(韋賢)에 관한 일화이다. 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경서를 가르쳐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말이다.
일경지훈(一經之訓)이라 『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경서 한권을 물려주라』

위현(韋賢 기원전 148-60년)의 자(字)는 장유(長孺)이며 서한(西漢) 초기 인물이다. 원래 조상은 팽성(彭城)에 살았지만 고조부 때 추현(鄒縣)으로 이사했다. 추현은 맹자가 태어난 곳이자 공자가 활동했던 옛 노(魯)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예전부터 유학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지방이었다.
  
『한서(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위현은 천성이 순박하고 돈독했으며 명예와 이익에 대해 아주 담담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력을 기울여 책을 읽었으며 학식이 아주 넓어 『예기(禮記)』, 『상서(尙書)』 등 유가의 여러 경전에 정통했다. 특히 『시경』에 능해 『시경』 강의로 일가(一家)를 이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존중하는 뜻에서 ‘추노대유(鄒魯大儒 추노 지방의 큰 선비라는 의미)’라 불렀다.

한 무제(武帝) 때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자백가 중 오직 유가(儒家)만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널리 유학을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유가 경서에 정통했던 위현도 박사로 추천 받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경학(經學)의 체계가 잡히기 전이라 매 경전마다 여러 개의 파로 나뉘어 학문적인 경쟁이 치열했다. 예를 들면 『역경(易經)』의 경우 고(高) 씨와 경(京) 씨의 구별이 있었고 『상서』의 경우에도 구양(歐陽) 씨와 하후(夏侯) 씨의 구별이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지방에서는 신공(申公) 이후 『시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으며 그 후 강공(江公)에 이르러 경전을 배우는 학생들이 아주 많아졌다. 이 강공이 바로 위현의 스승이었다. 위현은 스승의 학문을 전수받은 위에 진일보로 연구에 정진해 자신만의 독특한 학술체계를 갖춰 ‘위(韋) 씨의 학문’이라 일컬어졌다.

위현에 대한 명성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특별히 그를 초빙해 박사로 삼은 것이다. 무제의 뒤를 이은 한(漢) 소제(昭帝)는 위현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고 『시경』을 배웠다. 오래지 않아 위현의 벼슬은 날로 높아져 광록대부(光祿大夫), 첨사(詹事)를 거쳐 대홍로(大鴻臚 외무부 장관에 해당)에 이르렀다. 소제가 붕어한 후 위현은 선제를 옹립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워 관내후(官內侯)에 봉해졌고 정식으로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다.

선제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선제는 위현에게 승상(丞相 지금의 총리에 해당)직을 맡겼다. 당시 위현이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선임된 것은 선제의 신임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5년 동안 승상직을 맡은 후 고령(高齡)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다. 선제는 더 이상 그를 잡아둘 수 없음을 알고는 사임을 허락한 후 특별히 황금 백 근을 하사했다. 몇 년 후 위현이 세상을 떠나자 선제는 ‘절후(節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위현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인 위방산은 지방 현령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위굉은 동해태수를 지냈으며, 셋째인 위순은 유가의 예법에 따라 고향에 머물면서 조상의 묘를 지켰다. 막내인 위현성은 재주와 학문이 뛰어나 부친과 마찬가지로 중용되었다. 그 역시 나중에 승상의 지위에 오르니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 승상을 배출한 것이다. 때문에 추현(鄒縣) 인근에서는 ‘자식에게 황금을 한 바구니 가득 남겨주는 것이 경서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전해지게 되었다.
 
유자 황금만영 불여일경(遺子 黃金滿盈 不如一經)
많은 재물상속은 경전교훈 전수(傳授)만 못하다.

소시독서불용심(小時讀書不用心)젊어 독서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부지서중유황금(不知書中有黃金)책속에 황금이 있다는 이치를 모른다
흑발부지근학조(黑髮不知勤學早)젊어서 부지런히 배워야 함을 일찍 깨닫지 못하면
백수재회독서지(白首才悔讀書遲)백발이 되어서 공부가 늦었음을 비로소 후회 한다.
투래적재이진(偸來的財易盡) 훔친 재물은 쉽게 없어지고
매래적관이괴(買來的官易壞) 사들인 관직은 금방 타락한다.

재물에는 다리와 날개가 있어 달아난다. 노리는 사냥꾼과 승냥이가 호시탐탐한다. 그러나 경전지식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권불십년(權不十年), 부불삼세(富不三世) 권력과 부는 에서의 팥죽과 같다.
그러나 지식과 지혜는 장구(長久)하다.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웠던 인물 중 한 명이 진 무제(晉武帝) 때 인물 석숭(石崇)이다. 금곡(金谷)이란 말은 석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석숭이 낙양(洛陽) 서북쪽 계곡에 금곡원(金谷園)이라는 별장을 지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녹주전(綠珠傳)』에 따르면 계곡에 금수(金水)가 흐르기 때문에 금곡이라고 전한다.

석숭은 1,000여 명의 미인 중에서 수십 명을 선발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꼈던 애첩이 녹주였다. 녹주는 피리를 잘 불고 ‘명군(明君)’이라는 춤도 잘 추었다. 명군은 흉노(匈奴) 황제에게 시집가야 했던 비운의 미녀 왕소군(王昭君)을 뜻한다. 소(昭)자가 진나라 문제(文帝)의 이름이기 때문에 소(昭)자를 비슷한 명(明)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석숭의 호사생활은 다름 아닌 녹주 때문에 파탄에 처한다. 녹주를 달라는 권신 손수(孫秀)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모함에 걸려 처자 열다섯 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수레에 실려 처형장인 동시(東市)로 끌려가던 석숭이 “종놈들이 내 재산을 탐냈기 때문이다.”라고 억울해하자, 압송하는 사람이 “재산이 해를 끼치는 줄 알았으면 어찌 일찍이 분산시키지 않았는가?”라고 충고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의 귀신(詩鬼)이라고 불렸던 당(唐)나라 이하(李賀)는 부귀한 집안의 자제들을 풍자한 ‘소년을 조롱함(嘲少年)’이란 시를 지었다. 이 시에서 그는 “태어나 반 권 책도 읽지 않았지만, 다만 황금을 쥐고 귀한 신분 사들이네.(生來不讀半行書/只把黃金買身貴)”라고 비판했다. 세습 부자에 대한 이런 반감 때문에 자식에게 황금보다는 지식을 물려주라는 교훈이 생겨났다. 『한서(漢書)』 ‘위현(韋賢)열전’은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 추(鄒)읍 사람 위현이 네 아들을 모두 공부시켜 동해 태수(太守)나 승상(丞相) 같은 고위 관직을 역임하게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추읍의 선비들이 “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경서 한 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고 칭송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광산 채굴을 엄금했던 것은 배금(拜金) 풍조가 성행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영조 5년(1729) 호조에서 함경도 안변(安邊) 금곡(金谷)에서 은(銀)이 많이 생산되니 광산을 열어 채취하게 하자고 청하자 영조는 당(唐) 나라 권 만기(權萬紀)가 은(銀)을 채취하자고 청했을 때 당 태종이 ‘수백만 꿰미의 은을 얻는 것보다 어진 인재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낫다.’고 거절한 사례를 상기시키면서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재벌가에 돈을 둘러싼 형제간의 다툼이 반복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동의가 없는 부는 칼날 끝에 놓인 것이라는 사실을 석숭의 사례는 보여준다.

 

<프로필>
양태영 시조시인,수필가 (아호:晶石, 법명:雲海)
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절물생태관리사무소 근무
사)한국문인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 사무국장
사)한국 한울문인협회 회원
사)대한민국국보문인협회 회원
사)대한민국문화예술교류진흥회 회원
사)귤림문학 부회장
영주문인협회 편집위원
제주특별자치도 가정위탁지원센터 아이누리 편집위원
제주시청산악회 회원
대한민국공무원산악회 회원
                                                한울문학 청룡문학대상 수상 시 부문(2008)
                                                한국문학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대상(2009)
                                                동인문집 <내 마음의 숲> <하늘빛 풍경> 시집<모닥불>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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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 2015-06-09 14:34:39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