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제주 근대 상가지 ‘칠성골’…잡화점 형태 상권 대부분 차지
최초 제주 근대 상가지 ‘칠성골’…잡화점 형태 상권 대부분 차지
  • 하주홍 기자
  • 승인 2015.06.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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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옛길을 걷다]<3>
칠성로(2) 일제 강점기부터 형성…8.15광복 뒤 패션·의류판매업 주력 업종

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성’을 바탕으로 한 제주지역 지리·역사적 근원지이자 중심이다. 이곳은 제주 과거와 현실이 함께 포개진 역사문화공간이다.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며 생활공간이다. 원도심의 동맥은 ‘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제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옛길’을 취재, 역사·지리·건물·상권·문화·인물 등 삶과 기억의 궤적을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제주 원도심 위상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생과 미래설계를 찾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칠성로 보금당 부근 모습 (1990년6월 찍음)

# 제주상권 원조지역 ‘칠성로’ 

무릇 상가란 관공서와 주택가가 있고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상가는 주로 제주읍성 중심부인 본정통(本町通, 칠성통, 현재 칠성로)과 원정통(元町通,원정로,현재 관덕로)일대, 남문한짓골(현 남문로), 서문한질(현 서문로)쪽에 자리 잡았다.

그 가운데 유명 상가는 거의 칠성로에 자리 잡았고,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2000년대까지도 그 전통과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먼저 상가가 들어섰고, 업종도 가장 다양했기 때문에 ‘제주상권 원조(元祖)지역’이란 특별한 이름이 부여됐다.

대표적인 업종은 의류, 귀금속, 잡화점, 양화점 등을 비롯해 당구장. 제과점, 식당 등 매우 다양했다.

# 일제 강점기엔 어떤 상가가 있었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펴낸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을 보면 당시 제주지역 상업관련 자료를 엿볼 수 있다.

1937년과 1939년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된 책자 뒤엔 그 시절 도내 기관과 상가 광고가 수록돼 있다.

당시 칠성로에 있었던 업종은 주로 지금 슈퍼마켓처럼 다양한 품목을 파는 잡화점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귀금속류 등 여러 업종이 함께 했다.

일제 당시 관덕정 쪽에서 본정통 서쪽 끝으로 들어서면 三和商店(삼화상점. 뒤에 文의원→한국투자신탁제주지점자리)과 伴商店(반상점, 뒤에 문구류 취급하는 한양상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선 미곡·주류·석탄·문구류 등을 팔았다. 삼화상점은 三和丸(삼화환), 八幡丸(팔번환) 등 선박을 갖고 해운업까지 손대고 있었다.

특히 반상점은 자본금이 3만원(圓)이었던 당시로선 규모가 큰 합자회사였다.

바로 옆엔 각종 지물류, 석유와 잡화 등을 주로 취급했던 大山商店(현재 대산상회자리)이 있었다.

현재 문구점인 대산상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 따라 식료품을 팔았던 衛藤商店(뒤에 고규진철물상회→에스에스패션자리)등이 있었다.

村田식료품 상회가 있던 곳엔 뒤에 다방이 들어섰다.

大龜商店등에서 신발류를, 田口商店에선 화약류·석탄·지물류와 사무용품 등을 취급했다.

京城屋에선 양과자를 만들어 팔았다.

당시 이곳 상점들 대부분 간판에 상호와 함께 ‘洋品百貨’(양품백화)란 글귀를 적어놓았다.

이는 상점마다 어떤 특정품목만을 취급하는 전문성을 띠지 못하고, 다양한 품목을 팔았던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설령 ‘百貨’(백화)란 이름을 썼다 해도 현재 백화점과는 다른 것이었다.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지금의 슈퍼마켓이나 대형 잡화점 형태로 볼 수 있겠다.

이곳엔 낙원여인숙이 있었던 자리에 石松旅館이 있었다.

이 여관은 2층 건물로 당시 도내에선 숙박업소로선 가장 규모가 컸고, 외부에서 온 귀한 손님이나 고관들이 주로 묵었던 곳으로 유명했다.

아울러 칠성로에서 현재까지도 막강한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귀금속·시계류 판매업의 시초도 일제강점기부터 비롯되고 있다.

원조격인 水羽시계점, 森시계점 등이 본정통에서 자리를 굳힌 이래 시계상점이 꽤 많이 생겨났다.

특이한 건 상호가 시계점이지만 시계류와 귀금속류는 물론 안경·축음기를 팔고 수리했다. 어떤 곳에선 미술품을 만들어 팔았다.

지금까지 정확한 자리가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됐던 신문을 맡아 취급했던 四元勝美商店도 칠성로에 있었다.

이 상점에서 지문방구류를 판매하면서 濟州印刷社란 상호로 당시 釜山日報·光州日報·大阪朝日新聞 지국을 맡고 있었다.

당시 칠성로는 도내에서 가장 다양한 품목의 상품을 취급했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면 본정통에 가면 된다”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상권이 번창했다.

상업자체가 지금처럼 전문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칠성로는 당시 제주 ‘상권’(商圈) 중심지이자 ‘상권’(商權)도 거머쥐고 있었다.

이때 상권은 처음에 일본인이 많이 갖고 있었지만 점차 한국인들이 경영권을 갖기 시작했고, ‘8.15광복’이 가까워지는 시점에선 거의 대등하게 나눠 갖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성로 상가 끈끈한 자생력은 이때부터 생겨나면서 해방을 맞게 됐다.

1990년6월 칠성로 서쪽끝에서 중앙로 방향 상가지도.
1990년6월 칠성로 중앙로쪽에서 동쪽 방향 상가지도.
 

# 8.15광복 뒤 칠성로, 어떤 상권이 자리 잡았나.

8.15 해방 이후 칠성로는 제주지역 상권과 유행과 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가장 전통을 갖고 있는 업종은 귀금속·시계류 판매업이었으나 패션·의류판매업이 새로운 주력업종으로 전통을 쌓아왔다.

이를 방증이나 하듯이 1990년초 관덕정(觀德亭)광장에 있었던 옛 교통대자리에서 북동쪽으로 난 칠성로로 접어들면 길 양쪽은 온통 옷가게 간판으로 장식돼 있었다.

한 두 집 건너면 거의 옷 가게이고, 맞춤 양복점에서 메이커 제품인 기성복 가게까지 들어섰다.

당시 만해도 “칠성로에서 옷을 해 입었다면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멋쟁이랄 수 있지”란 말을 듣곤 했다.

이는 내로라하는 전국 유명 패션·의류메이커 대리점이 거의 이곳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단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른바 최고급 의류대리점 점포를 자리 잡으려면 이곳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칠성로가 첨단유행의 본산으로 자리 잡게 된 기원은 일제 강점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양에서 수입했거나 서양식으로 만든 장신구·일용품 등의 잡화를 파는 이른바 ‘양품점’이 많아 들어섰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옷맵시를 뽐내는 젊은 선남선녀들이 늘 활보하는 모습에서“역시 칠성로구나”하는 느낌이 저절로 나오던 시절이 오랜 기간 이어졌다.

1980년대 들어 인근 관덕로 지하에 제주중앙지하상가가 생기면서 새로운 의류상권이 나타났지만 고급의류 상권에 큰 영향은 주지 않았다.

한 의류판매업자는 “여전히 제주 멋쟁이들은 이곳을 찾고 있다”며 “중저가 상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하상가와 공존하는 모습을 띠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당시 칠성로에서 만난 한 직장여성은 “패션의 첨단을 걷는 것과 비례해 옷값이 엄청나게 비싸 괴리감을 느낄 때가 많다”는 푸념에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창 논란이 됐던 ‘과소비풍조 조장지역(?)이 칠성로’란 말이 나올 정도로 최고급 상품을 파는 상가가 집단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비싼 옷만으로 장식된 것은 아니었다. 그다지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고 값이 비교적 헐한 의류를 구하기 쉬운곳도 이곳이었다.

양복점·의상실 등 맞춤복 점포 외에도 토탈패션·하이패션이란 상호를 가진 보세품·기성복 등 판매점도 함께 성업을 이뤘다.

<하주홍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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