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02:42 (토)
제주의 돌 신앙
제주의 돌 신앙
  • 고희범
  • 승인 2015.05.22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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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51회 제주탐방 후기

바다에서 고기는 잡히지 않고 바위덩이가, 그것도 몇차례나 그물에 걸려 올라온다면 어떨까? 일진이 대단히 나쁜 날이거나,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신당에 모시는 '돌미륵'이 이렇게 해서 바다에서 올라 오게 된 경우가 있다. 제주시 화북동에서 구좌읍 김녕리까지 동부지역 네 곳에 있는 당이 비슷한 내력을 갖고 있다. 이렇게 올라온 돌을 돌미륵이라고 여기는 것은 불교의 미래불인 미륵 신앙과 제주의 민간신앙이 절묘하게 합성된 것으로 보인다.
 
화북 윤동지영감당 본풀이에 이 당의 내력이 전해진다. 이 마을에 사는 어부 윤씨 하르방이 바다에 갈치를 낚으러 나갔다. 그러나 갈치는 잡히지 않고 돌덩이가 연거푸 세번이나 올라오는 것이다. 윤씨 하르방이 돌미륵을 이물칸(배의 앞 부분)으로 끌어올리면서 "내게 태운 조상이건 이 바당 괴길 하영 낚으게 허영 전배독선시켜 줍서"(내게 내려진 신령이면 이 바다 고기를 많이 낚아 전배독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전배독선'(全船獨船)이란 '물건을 가득 싣고 육지로 나가 팔기 위해 빌리는 배'를 말하는 것이니 한 배 가득 갈치를 잡게 해달라는 뜻이다. 놀랍게도 갈치가 끝도 없이 잡혀 고물칸(배의 뒷 부분)과 이물칸을 가득 채우게 됐다. 윤씨 하르방은 화북포구로 들어와 현재의 금돈지에 돌미륵을 내린 뒤 집으로 돌아갔다.
 
금돈지에 버려진 길쭉한 모양의 돌미륵은 화북포구로 들어온 배들이 닻줄을 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얼마 후 윤씨 하르방은 몸에 부스럼이 나고 시름시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 의원을 찾아 다녀도 몸이 낫질 않자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낮인(낮에는) 벹 이실(볕 이슬) 맞히곡 밤인(밤에는) 찬 이실 맞히멍 석상미륵 돌부처를 박접한 죄우다"라는 것이다. 윤씨 하르방은 그제서야 자신이 돌미륵을 포구에 버리고 온 일이 떠올라 돌미륵을 마을 안으로 옮겨왔다. 당을 세워 돌미륵을 모시고 정성을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 사라지고 집안도 부자가 되었다.

창호지에 싸여 있는 윤동지영감당의 돌미륵. 사진 왼쪽은 당신(堂神) 윤동지영감의 보좌역인 군졸로 역시 송낙을 씌워놓았다.

그런데 마을 청년들이 윤씨 하르방이 엉뚱한 짓을 한다고 당에 불을 질러버렸다. 당에 불이 번지자 돌미륵이 스스로 걸어나왔다. 윤씨 하르방은 마을 밖에 있는 밭 옆에 당을 세우고 돌미륵을 모셨는데 윤씨 집안 후손들이 대대로 모시는 신당이 됐다. 윤씨 집안이 부자로 대를 잇자 마을사람들도 찾게 돼 윤씨 가문의 신당이 마을 신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당의 당신인 돌미륵 윤동지영감은 특이하게 두 장의 창호지로 싸여있다. 돌미륵이 금돈지에 버려졌을 때 닻줄에 매여 졸렸던 허리춤에 한 장을 두르고, 또 한 장은 송낙(고깔)을 만들어 이슬을 맞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당은 부스럼을 낫게 하고 부를 안겨준다고 한다. 당에는 당신을 보좌하는 군졸도 모셔지는데 이 당의 군졸은 윤동지영감보다 음식을 세 배나 많이 먹는다. 이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제물을 올릴 때 윤동지영감에게는 메를 한 그릇 올리지만 군졸에게는 세 그릇을 올린다는 것이다. 당신을 대신해 활동을 그만큼 많이 하는 모양이다.
 
김녕리 영등물 바닷가의 서문하르방당은 화북 윤동지영감당과 내력이 비슷하다. 이 마을 어부 윤씨 하르방이 어느 날 바다에 나갔는데 그물을 걷어올렸더니 미륵돌이 올라왔다. 돌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다시 그물을 내렸지만 다시 미륵돌이 올라온 것이다. 이번에는 장소를 옮겨 그물을 내렸는데도 세번째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윤씨 하르방이 이날 밤 꿈을 꾸었다. 미륵돌이 나타나 "나를 곱게 모셔주면 자식 귀한 사람에게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윤씨 하르방은 "이것이 내게 태운 조상이로구나" 생각하고 다음날 바다로 나가 그물을 내려 미륵돌을 건져올려 이곳에 당을 세웠다는 것이다.

 

서문하르방당은 아들을 낳는 데 특히 효험이 있고, 잔병이 많은 아이들의 병을 고치는 직능도 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자식을 얻기 위해 심방(무당)을 불러 당에서 치성을 드릴 때 심방이 놋사발 뚜껑 두개를 던져 점을 치는데 두개 모두 엎어지면 아들을 낳게 되고 하나만 엎어지면 더 공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조천읍 함덕리 서물당도 같은 내력을 지니고 있다. 제주 민속 연구가 진성기에 따르면 이 마을 노인이 낚시하기에 좋은 서물날(음력 11일, 26일) 낚시를 갔는데 하루 종일 돌미륵만 낚시에 걸려 올라왔다는 것이다. 다음 서물날에도 마찬가지여서 낚시를 접고 낮잠을 잤는데 꿈에 낚시에 걸렸던 돌미륵이 나타나 자신은 "용왕국 무남독녀 아기"로 "알가름 팽나무 아래 나를 모시면 가는 배 오는 배를 돌보아 낚시질을 도와주마"고 했다는 것이다. 이 노인이 깜짝 놀라 다시 낚싯줄을 던져 돌미륵을 끌어올렸다. 돌미륵이 얘기한 대로 알가름 팽나무 아래 묻고 제단을 만들어 서물날마다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런 내력으로 '서물당'이 되었고 당에는 신에게 폐백과 음식 등 제물을 바치는 ‘궷문’만 제단 위에 세워놓았다.

조천읍 신촌리 고동지은진미륵당도 바다에서 올라온 돌미륵을 당신으로 모신 당이다.

조천읍 와산리 눈미불돗당은 돌미륵과는 다르다. 옥황상제의 막내딸 '불도삼싱또'가 아버지의 비위를 거슬려 지상에 유배당하면서 커다란 바위가 되었다. 와산리 마을 뒤 당오름 꼭대기에 내려와 있던 불도삼싱또는 아들을 낳게 해주는 신통력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없는 집 여인이 불도삼싱또를 찾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더니 임신이 됐다. 이 여인이 감사인사를 드리려고 당오름을 오르다가 몸이 무거워 도저히 오름 꼭대기까지 오를 수가 없었다. 이 여인이 "오름 아래로 내려와 달라"고 빌었더니 바위가 저절로 굴러 오름 중턱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삭의 임산부는 불도삼싱또가 내려온 중턱까지도 오를 수가 없었다. 다시 "조금만 더 내려와 달라"고 빌었더니 바위가 다시 굴러 현재의 당이 있는 오름 자락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곳에 밭을 소유하고 있던 이가 땅을 내놓아 당을 세우고 불도삼싱또를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도삼싱또는 아들을 점지하는 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삼승할망'이나 '일뤠할망'과 성격이 비슷하다.

이날 해설을 맡은 한진오 신나락 대표는 와산리에는 원래 마을 본향당이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눈미불돗당을 주로 찾게 되자 본향당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불도삼싱또가 "끄끄렁내(그을음 냄새)가 나서 같이 못 있겠다"고 하는 바람에 본향당 당신을 바깥으로 다시 옮겨 놓아 당에는 불도삼싱또의 보좌역인 군졸 '놀레와치풍네와치하로산또'만 자리를 잡고 있다. 와산 본향당의 당신인 '베락장군베락소제'는 벼락으로 불을 일으키는 신이어서 그을음 냄새가 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랜 세월 제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온 돌미륵과 거석을 돌아본 뒤 우리는 구좌읍 송당리 비치미오름을 향했다. 번영로에서 작은 표지가 서 있는 동쪽으로 샛길을 따라 들어선다. 비치미오름까지는 500m다. 식물원 '부성원'을 지나자 '내창'이 나타난다. 천미천이다. 그대로 지나칠 뻔했던 천미천에는 예상치 못한 절경이 숨어 있었다. 맑은 하늘 아래 신록의 푸르름이 못에 비치는 모습은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의 '먼물깍'을 연상시킨다.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다.

조천읍 교래리 돌오름에서 발원해 표선면 하천리까지 이어지는 천미천은 40여개의 오름을 끼고 흐른다. 천미천 본류는 60여개의 작은 하천들이 합류하면서 구좌읍 송당리와 성읍리를 지나며 너비 30여m의 제법 넓은 '내창'을 만들고 표선면 하천리 바다에 이르러서는 폭이 100여m에 이를 정도로 넓어진다. 천미천 역시 제주의 전형적인 건천임에도 곳곳에 소(沼)가 발달해 있다.
 
길에서 내창 안으로 들어가자 파호이호이 용암(화산 폭발 때 흘러나온 용암의 점성이 강해 편평한 판을 이룬 형태)이 덮여 있었다. 내창에 군데군데 물이 고여 널찍한 못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바닥에 용암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큰 물이 났을 때를 대비해 사람과 마소가 통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폭 60~70cm 정도의 콘크리트 다리도 주변 풍경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표고 344m의 비치미오름은 말굽형 분화구를 품고 있다. 비치미오름은 '꿩이 나는 형상을 하고 있어 飛雉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도 있으나 제주인들이 한자를 섞어 이름을 붙였을 리는 없어 보인다. <오름나그네>를 쓴 김종철은 "비치미(飛雉미)는 오름 이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말 '미'나 '메'에 한자어가 합성된 셈이어서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고 썼다. 김종철은 "조선시대의 지도에도 '비치악'은 없고 그 위치에 '橫山'(횡산), 또는 '橫岳'(횡악)이라고 기재돼 있다"면서 "비스듬히 비끼어 뻗은 형태로 볼 때 '횡산'이란 '비치미'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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