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골’, 원도심 옛길 가운데 가장 유서 깊고 번화한 곳
‘칠성골’, 원도심 옛길 가운데 가장 유서 깊고 번화한 곳
  • 하주홍 기자
  • 승인 2015.05.21 12: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옛길을 걷다]<2> 칠성로(1) 제주 근대상권 원조·중심지…‘산지목골’‘알생깃골’‘막은골’‘샛물골’ 등 이어져

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성’을 바탕으로 한 제주지역 지리·역사적 근원지이자 중심이다. 이곳은 제주 과거와 현실이 함께 포개진 역사문화공간이다.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며 생활공간이다. 원도심의 동맥은 ‘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제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옛길’을 취재, 역사·지리·건물·상권·문화·인물 등 삶과 기억의 궤적을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제주 원도심 위상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생과 미래설계를 찾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칠성로 옛길

 #제주 원도심 옛길 가운데 가장 유서가 깊고 번화했던 대표적인 길은 어딜까.

 제주시 원도심에서 남북 방향은 ‘한짓골’(남문골, 현재 남문로 南門路), 동서 방향으론 ‘칠성골’(현재 칠성로 七星路) 등 두 곳을 꼽을 수 있다.

옛 ‘칠성골’을 중심으로 형성된 ‘칠성로’는 여러 면에서 많은 역사와 사연이 깃든 곳이다. 제주지역 경제·문화·사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상권이 가장 먼저 형성된 곳이 칠성로가 단연 첫째로 손꼽힌다.

도내에서 근대적인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부터였다. 그 이전까진 대부분 봇짐이나 등짐장수인 보부상 모습으로 상거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0년 이후 칠성로는 일제가 ‘혼마찌’(본정통 本町通, 나중에 칠성통)라고 이름을 붙였다.

본정통(本町通)은 일제가 ‘그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붙이는 이름’이기 때문에 칠성로가 당시 제주도내에서 가장 번화했던 길이라는 걸 방증하는 셈이다.

‘본정통’이란 거리 이름은 서울에서 충무로를 일컫는 등 청주·나주 등 국내 여러 도시에도 있던 일제가 만든 명칭이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도 칠성로는 제주 ‘명동’(明洞) 또는 ‘긴자’(銀座, 일본 도쿄 번화가)로 일컬어질 만큼 일제 강점기부터 명성을 얻어왔다.

지금은 많이 쇠퇴하긴 했지만 제주지역 ‘유행 첨단거리’‘낭만 중심지’‘최고급 메이커 의류·신발·장신구류가 모여 있는 곳’로 명예가 이어오고 있다.

1913년에 만든 지적도에 나온 칠성로(분홍색 길)

# ‘칠성로’는 어떤 옛길로 이뤄졌을까.

칠성로는 동서로 구부러진 모습을 한 ‘칠성골’을 큰 줄기로 이뤄졌다. 길 동쪽으로 ‘산지목골’,남쪽으로 ‘알생깃골’, 중간에 ‘막은골’, ‘샛목골’, 북쪽으로 ‘창신골’등 여러 갈래 길로 이어져 있다.

‘칠성골’은 옛날 칠성 가운데 첫 별을 배치하는 땅이고, 칠성단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나중에 ‘칠성동’이 됐다.

일제강점기 상가로 개화하기 시작한 칠성로는 8.15해방을 맞으면서 제주 상권 중심지이자 문화공간과 낭만의 장소로 활짝 꽃피우게 된다.

현재 칠성로 범위는 서쪽끝이 제주감귤농협 중앙로지점 (옛 갑자원→대우유통제주센터자리 등)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론 동문로터리와 접한 산지천에 놓인 다리 ‘광제교’앞까지이다.

그러나 원래 칠성골은 제주감협중앙로지점에서 현재 귤림초밥(옛 순창옥자리)까지를 일컬었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길 따라가면 ‘산지목골’, 옛 동일의원 자리에서 남쪽으로 골목을 따라가면 길이 막혔다고 해서 ‘막은골’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방이전엔 칠성골에만 상가가 들어서 있었고, 산지목골이나 막은골엔 상가가 거의 없었고 주택가를 이뤘다.

‘산지목골’(중인동 重仁洞)은 칠성로 동북쪽 광제교 부근 마을이다. 건입동 산지포로 가는 길목으로 산지 입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제교에서 칠성골로 들어가는 자리가 ‘산지목’(산지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중인문(重仁門)이 있어서 중인동이라고도 했다.

‘샛물골’(샛뭇골·重仁洞)은 칠성로 중간에서 동북쪽으로 산지천 앞까지 빠지는 길이다.

옛 제일극장이 있던 자리에서 SC(스탠다드차타드)은행 제주지점(옛 제일은행제주지점) 자리 북쪽으로 나가는 골목길과 주변 마을이다. 과거 일도1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알생짓골’(알생깃골. 하교동 下校洞. 범골. 부엉골. 벙골)은 웃생깃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옛날 향교가 있었던 관덕로 북쪽이 있는 마을을 말한다.

‘알향교골’에서 ‘밑’을 뜻하는 ‘알’에다 ‘행’자가 ‘생’으로 변해 알생깃골로 불린다. 지금은 중앙로가 탑동까지 관통함으로써 길이 거의 흔적이 없다. 옛 아세아극장에서 현재 천년타워(옛 문종후의원 자리)까지 난 샛길이다.

‘막은골’(막은 굴, 두동, 杜洞)은 한쪽으로 트여 있지만 막다른 골목으로 막혀 있는 마을을 일컫는다. 칠성로 옛 동일의원 자리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말한다.

‘창신골’은 칠성골 옛 아세아극장(중앙극장)에서 제주북초등학교 앞 객사골 사이에 난 길을 말한다. 과거 창신(가죽신의 제줏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에서 유래한다.

이곳 주변은 제주목 관아를 비롯한 관청 등이 자리했고, 관리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죽신 수요가 많았다. 창신골 위치에 관해선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기도 하다.

현재 칠성로(분홍색 길)

# 칠성로는 왜 허리가 세 동강 났나.

1913년에 만들어진 제주시지역 지적도에 나온 길과 지금 길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많이 난다. 일제강점기에 새롭게 만든 길을 비롯해 모든 길이 100년이 지나는 만큼 제주시가지에 변화가 많았음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제주 원도심 길 모습을 보면 과거엔 동→서쪽로 관덕로와 동문로, 서문로가 있었고, 남→북쪽으로는 한짓골(남문한질)이 중심 길이었다.

하지만 1960년말 중앙로가 새로 뚫렸고, 탑동 해안을 3차례에 걸친 매립으로 새로운 변수가 떠오르게 된다.

기존 길에서 탑동 매립지로 남→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속속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칠성로가 변혁을 맞기 시작한 건 탑동쪽으로 향하는 길이 여럿 생기면서 허리를 꿰뚫는 바람에 길이 잘리면서부터였다.

1960년대 말 중앙로가 남문사거리에서 관덕로까지 곡선으로 생겨났다. 당시 권세가 때문에 길 방향이 당초 계획과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비판도 있었던 문제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이 난 뒤 3차 탑동매립이 이뤄지면서 칠성로를 뚫고 탑동까지 길이 이어졌다.

여기에다 관덕로까지 내려왔던 오현로가 탑동까지 이어지면서 칠성로는 다시 허리가 잘렸다.

세번째로 칠성로와 샛물골이 만나는 곳에 있던 영화관인 옛 제일극장이 있던 자리에서 다시 탑동쪽으로 새 길이 나면서 북성로와 함께 칠성로가 다시 뚫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칠성로에서 영업을 하는 사업주들은 “칠성로가 자주 뚫려 허리가 잘리다보니 상권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한다.

이는 ‘칠성’이 원래 뱀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마치 뱀 허리가 잘리는 것에 비유하면서 나온 듯하다.

칠성로 허리가 동강나면서 여러 상가가 헐려나간 건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특히 한때 제주지역에서 대표적인 영화관이었던 제일극장과 아세아극장(옛 중앙극장)이 헐리면서 문화의 거리를 상징하던 시설이 사라지게 됐다는 점이다.

<하주홍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