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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류기는 하멜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줄곧 왜곡”
“하멜표류기는 하멜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줄곧 왜곡”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5.04.14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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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29> 하멜 이야기
하멜이 타고 오다가 표류한 상선을 전시해 둔 사계리. 표착지점은 이 곳이 아니다.

헨드릭 하멜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게다. 서양에 조선을 알린 인물로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멜의 이야기가 서양에 번진 건 1668년이다. 1668년은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 지 2년 뒤의 일이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 서점의 한 코너에 이색적인 책이 꽂혔다. 불과 50쪽에 불과한 책이었지만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꼬레’라는 작은 나라와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야만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 1666년으로 되돌아 가보자. 1666년 9월 일본 나가사키에 주재하고 있던 동인도회사 무역관장 앞으로 이해할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상한 복장(조선 옷)을 한 이들이 13년전 사라진 스페르베르호 선원이라며 주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사실 하멜 일행은 실종으로 처리된 상태였다.

스페르베르호는 1653년 9월에 동인도회사 무역관이 있는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진 터였다. 그해 일본으로 가던 중 스페르베르호가 제주에 표류했던 사실을 조선인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1년 뒤인 1654년 10월 스페르베르호와 그 배에 실린 화물을 장부에서 삭제하고, 선원 64명의 실종을 발표한다.

죽은 걸로 알았던 이들의 생환. 그것도 무려 13년만에 등장한 이들을 바라보는 눈은 어땠을까. 게다가 네덜란드인들에겐 생소한 ‘꼬레’라는 곳의 등장은 그야말로 흥분 그 자체였다. 네덜란드 출판사들은 앞다퉈 하멜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무려 3곳의 출판사에서 동시에 책을 내놓았다. 그해가 앞서 얘기한 1668년이다.

1668년은 분명 하멜의 이야기를 담은 책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출간된 때는 맞다. 하지만 하멜이 그때 네덜란드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1668년 하멜이 도착한 후 책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미국인 학자 레드야드는 1670년에야 하멜이 고향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실 호루쿰(하멜의 고향)에 보관돼 있는 손으로 쓴 문서에는 하멜이 1670년에 호르쿰에 정착했다고 돼 있다.

레드야드의 주장과 호루쿰에 보관된 문서를 기조로 하면 1668년에 다발적으로 나온 하멜 이야기는 뻥튀기 됐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렇다. 이들 책을 들여다보면 악어와 코끼리가 등장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글이 실려 있다.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야말로 ‘야만’을 집어넣었다. 그래야 책도 팔릴테니까. 이들 책은 하멜이 그리지도 않은 삽화도 마구잡이로 그려넣었다.

뻥튀기가 아닌, 하멜의 표류를 담은 진짜 이야기가 출간된 건 한참 후인 1920년이다. 하멜의 진짜 이야기는 조선을 매우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멜은 학식이 풍부한 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 더욱이 하멜은 조선인을 야만으로 규정하질 않았다.

“절도사는 우리들에게 천막 안에 있는 물건들을 봉인, 자기 앞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우리들이 있는 곳에서 우리 짐을 봉인했다. 우리가 거기 앉아 있을 때, 인양 작업 중 짐승 가죽이라든가 철물, 그 밖의 것을 훔쳐간 몇몇 도둑들이 끌려왔다. 도둑들에게 물건을 등에 지게 하고는 우리 앞에서 그들을 처벌했다.”<하멜표류기 중>

당시 목사는 이원진이다. 이원진 목사는 하멜과도 만남을 가졌다. 하멜은 이원진을 두고 “그 총독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왕에게 편지를 띄우고 국왕으로부터 답신이오면 일본으로 보내준다고 위로를 해주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하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접고 이익태 목사가 쓴 「지영록」을 얘기해야겠다. 왜냐하면 하멜 일행이 표착을 했다는 곳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어서다. 「지영록」은 1696년에 쓰여진 저서로, 하멜이 표류한지 43년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에 가깝게 쓰여졌다는 평가이다.

사계리를 오가는 많은 이들이 하멜이 도착한 곳을 이곳으로 잘못 알고 있다.

현재 하멜 일행의 표착지점은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일대 해안으로 돼 있다. 1980년엔 산방연대 밑에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지영록」은 다른 정보를 담고 있다. 「지영록」은 1997년 일반에 공개된다. 그해 공개된 「지영록」의 ‘서양국표인기’에 하멜 일행의 표착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서양국 64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대정현의 차귀진 관할인 대야수 연변에서 사고를 당했다….” <지영록 중>

「지영록」은 하멜 일행의 표착지점을 ‘대야수 연변’이라고 하고 있다. 대야수 인근 바닷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야수가 어디인가가 중요하다. ‘대야수’를 표기한 지도는 많이 나온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중 ‘한라장촉’엔 서림포와 사귀포 사이에 ‘대야수포’가 표기돼 있다. 서림포는 현재 일과리 일대이고, 사귀포는 고산리의 자구내 포구이다. 그렇다면 대야수포는 일과리와 고산리 사이가 된다. 영락리와 무릉리, 신도리 등의 바닷가이다. 그러나 어느 지점을 콕 집어서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익태는 ‘대야수포’라고 하질 않고, ‘대야수 연변’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지영록」을 들여다보면 현재 하멜 표착지를 사계리로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계리엔 스페르베르호를 재현해두고 있다. 지난 2001년이다. ‘용머리 관광지구 하멜 타운 조성사업’이라는 명목아래 하멜 상선을 만들어둔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이 곳을 오가는 이들은 하멜이 사계리에 도착했다고 믿고 갈 수밖에 없다.

하멜 관련 이야기를 담은 책에 실린 삽화. 하멜과는 연관이 없다. 오른쪽 삽화는 하멜 일행이 조선왕을 알현하는 장면이지만, 조선 왕의 모습이 아니라 서양 군주의 모습이다.

혹자들은 하멜 이야기를 담은 책에 실린 삽화를 보고, 신도리라고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 삽화는 1668년 스티히터가 펴낸 하멜 이야기에 실린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삽화는 하멜의 것이 아니다. 임의대로 집어넣은 산물이다. 더욱이 스티히터의 삽화는 하멜 일행이 당시 조선왕인 효종을 알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삽화를 보면 사실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조선왕을 표현한 게 아니라, 서양의 군주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멜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왜곡돼 전해오고 있는 역사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릴까. 우선은 잘못된 것을 지우는 작업이 우선돼야 한다. 하멜이 타고 왔다는 스페르베르호가 사계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들도 그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확실하게 답을 내려줘야 한다.

이쯤에서 하멜을 직접 만났다는 이원진 목사가 쓴 글을 확보한다면 더 이상의 논란은 없어도 되지 않을까. 현재 일본에 이원진 목사가 썼다는 「태호문집」이 있다고 한다. 그 문집에 하멜의 이야기도 담겨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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