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07:39 (금)
기억전달자
기억전달자
  • 홍기확
  • 승인 2015.03.02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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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74>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한다.
 최악의 음식솜씨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성격은 깔끔하고 조용하셨는데 아버지와 비슷했다.
 부모님이 모두 외출을 나가시면 1년에 한두 번쯤은 할머니가 요리를 해 주셨다. 정체모를 재료를 어딘가에서 공수하셨다. 그리곤 전 세계의 요리책을 뒤져도 비슷한 요리명을 찾을 수 없을 만한, 전대미문의 메뉴를 누나와 나에게 제공하였다. 맛은 또 어떤고? 일필휘지하자면 수많은 생각이 드는 맛이었다. 부모님의 외출은 곧 절망이었다.
 절약은 몸에 배었다. 돌아가신 후 방을 치울 때에는 헌 옷을 주워다가 한 땀 한 땀 기우고 고친 옷들이 장롱에 가득 차 있었다. 손자손녀부터 시작해서 아들딸까지, 주고 싶었지만 결국에 주지 못한 옷들로 인해 가족들은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침이면 항상 마당과 집 앞 주변을 빗자루로 쓰셨다. 방안에 앉으면 먼지뭉치나 쓰레기를 줍느라 늘상 오락가락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안절부절 못하며 앉아있었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오른손에는 항상 걸레가 쥐어져 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 쓰레기나 머리카락을 주으시면 그 곳을 닦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어느덧 15년 정도가 되어간다.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예뻐하셨다. 나역시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심부름을 즐겨 했다. 할머니의 어깨를 20년간 주무른지라 내 두 손의 악력은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세다.
 
 막내삼촌과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 할머니와 둘이서 잤다. 노인들은 노인 특유의 냄새가 난다. 할머니와 함께한 나는 지금도 그 냄새를 기똥차게 알아챈다.
 저녁에 잘 때마다 나는 죽음과 함께 했다. 죽음에 대한 책들도 많이 읽은지라 어릴 적부터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잠을 자다가도 할머니의 숨소리가 잦아들 때가 많았다. 그러면 혹시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조용히 옆으로 굴러가 숨소리를 확인한 적도 많았다. 지금도 그때 습관인지 몰라도 잠을 푹 자는 경우가 드물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고집(固執)이 생각난다. 노인 특유의 고집이었는지 몰라도 본인의 생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3남 2녀를 억척같이 키우셨으니까. 내 표현으로는 고작 3줄 밖에 안 되지만, 할머니가 본인의 역사와 고생은 책으로 쓴다면 몇 권이 될 터이다.

 이렇게 할머니의 짤막한 기록을 남긴다. 기억을 전달하고 싶다. 내가 죽으면 아마 이 세상에 내 아들에게,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다는 것을 말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와 할머니가 어떤 관계였는지 말해줄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기억전달자 역할을 자처한다.

 내가 할머니에게 배운 것은 이렇다.

 첫째, 청결이 우선. 대가족이 모인 집은 특히. 손님이 많이 오는 집은 더욱이. 나는 지금도 비교적 깔끔히 집안을 유지한다.
 둘째, 요리는 정성. 맛없는 요리도 맛있게 먹어라. 해주는 사람의 땀을 잊지 말아라. 나는 지금도 최악의 경우 몇을 제외하고는 요리에 대해 나쁜 하마평(下馬評)을 하지 않는다.
 셋째, 가족 간에 스킨십. 아내와 나와 아이는 아직도 서로를 자주 안아준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날 때도 마사지를 해준다.
 넷째, 자기주장(assertiveness). 단호함, 고집. 이것만큼은 최근 내가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가족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주장, 단호함, 고집, 심지어 거절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로부터 진하게 배운 것, ‘죽음’

 죽음을 안다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안다면 죽기 직전까지 ‘지금’ 무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나는 영원, 행운, 미래를 믿지 않는다. 믿는 것은 ‘죽음’뿐이다.

 며칠 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교를 졸업했다.
 10여년만에 다시 받는 대학교 졸업장.
 직장생활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계 없이 우직하게 걸어가니 졸업장이 나왔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미래형 고민을 하기보다는,
‘지금 이렇게 살자.’라는 현재형 노력을 하는 것이 좋다.

 핑계, 변명, 외면, 회피, 도피, 도망, 도주, 무시.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천천히 가더라도,
 올곧게 떳떳하게 앞으로 간다.

‘앞으로 가야겠다.’의 미래형이 아니다.
‘앞으로 간다.’의 현재형이다.

‘인생’은 동사(動詞)가 맞다. 분명하다.
 ‘삶’의 시제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현재형’이다.

 삶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는 죽은 게 아니다.
 죽기 직전까지 노력해야하고, 죽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배워야 하고, 죽기 직전까지 불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할머니의 삶은 끝났다. 하지만 나에게 추억과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의 삶과 추억으로부터 배움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할머니의 삶, 추억, 기억, 배움을 전달하는 일이다.

 살아있는 자로부터의 배움을 전달하는 사람을 유산전달자(遺産傳達者)라 하고, 죽은 자로부터 배움을 전달하는 사람을 기억전달자(記憶傳達者)라 명명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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