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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탐라, 그곳은 신들의 고향”
“아! 탐라, 그곳은 신들의 고향”
  • 고희범
  • 승인 2015.02.2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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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48회 제주탐방 후기

신구간(新舊間). 지상에 파견됐던 신들의 교체기간으로 신들이 모두 천상세계로 올라가 지상에는 신이 없는 기간이다. 대한(大寒, 1월20일) 후 5일부터 입춘(立春, 2월4일) 전 3일까지 일주일 동안 제주도 전역에서 이사가 진행된다. 신들이 제주인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기간인 셈이다.

신구간을 지내고 난 뒤 우리는 신들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기로 했다.

제주에는 신이 1만8천이나 된다고 한다. 사람의 생각과 손길이 미치는 곳에는 어디에나 관련되는 구실을 맡는 신이 따로 있다고 믿었던 셈이다. 이들 1만8천신이 모두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가운데 본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특정한 집안 사람들만 위하는 조상신, 한 마을이나 공동체가 함께 모시는 당신(堂神), 모든 사람이 모시는 일반신이다. 사람들은 사정에 따라 해당되는 신격을 찾아 기원하고 그 결과를 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강정식 제주학연구소장의 논문 '제주의 신앙·신화, 그리고 생애담'에서 인용)

'절 5백, 당 5백'이던 제주에 지금은 당(堂)이 몇 군데나 될까? 조선시대 제주목사 이형상의 대대적인 훼철 이후 미신타파 명분과 새마을운동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훼손을 견디고 살아남은 당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제주전통문화연구소가 지난 2008년과 2009년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확인된 당은 제주시 지역 192곳, 서귀포시 지역 199곳 등 모두 391곳이었다. 민초들의 삶 속에 뿌리박은 신앙은 오랜 세월을 두고 여전히 그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애월읍 상귀리 '황다리궤당'

마을의 당신(堂神)을 찾아가는 길은 바람도 없고 햇볕마저 따뜻해 마치 봄나들이라도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포근하다. 애월읍 상귀리 '황다리궤당'은 서부경찰서 맞은 편에서 500여m 떨어진 밭 뒷편에 있다. 당에는 방금 누군가 다녀간 듯 여섯 개의 양초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궤'는 제주어로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바위그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황다리궤당에는 '강씨 하르방'과 '송씨 할망' 부부신이 좌정하고 있다.

아주 먼 옛날 '소저국'에서 태어난 송씨 할망이 좌정할 곳을 찾다가 제주도가 맘에 들어 이곳에 도착한다. 사냥을 하던 강씨 하르방이 송씨 할망의 미모에 반해 수작을 건다. 송씨 할망도 싫지 않아 부부가 되기로 한다. 이들 부부가 이곳 황다리궤당에 좌정한 뒤 강씨 하르방이 돼지고기를 먹고 만다. 송씨 할망은 부정탄 강씨 하르방에게 "바람 아래로 내려 서라"면서 담 밖으로 쫓아낸다. 이후 송씨 할망은 '보름웃또'(바람 위에 머무는 님), 강씨 하르방은 '보름알또'(바람 아래에 머무는 님)가 되어 담을 사이에 둔 부부의 별거가 시작된다.

송씨 할망이 좌정한 황다리궤당 안쪽에 누군가 촛불을 밝혀놓았다. 제단에는 사탕과 과일이 바쳐져 있다.
 

황다리궤당 안쪽은 깨끗하게 청소가 돼 있었다. 겨우내 바닥에 쌓였을 낙엽을 누군가 깨끗이 쓸어놓았다.

당 왼쪽 바위 틈에는 계란이 조심스럽게 놓여있다. 당에서는 계란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제를 지낸 다음 계란의 껍질을 벗겨놓는데 아이들이 피부병을 앓지 않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담고 있다. 이날 탐방의 해설을 맡은 한진오 연구원(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은 "달걀이 닭 한마리에 해당하는 제물이기도 하고, 삶은 달걀의 흰자위 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염원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신본풀이에는 돼지고기로 인한 갈등 때문에 부부였던 신들이 별거를 하게 된 경우가 흔하다.

일부 돼지고기를 바쳐야 하는 당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당이 많다. 돼지고기를 바치지 못할 뿐 아니라 당에 가기 전 사흘동안 돼지고기를 먹어서도 안 된다. 남편을 쫓아낼 정도로 돼지고기를 싫어하니 당연한 일이다. 돼지고기를 먹은 상태에서 불가피하게 당에 가야 한다면 송씨 할망 대신 강씨 하르방을 찾아가면 된다. 돼지고기를 먹어 몸이 부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송씨 할망을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향나무 가지를 삶은 물을 마시거나 이 물에 목욕을 해 몸을 깨끗하게 하면 허락된다고 한진오 연구원이 귀뜸한다.

당에서 베풀어지는 제의는 큰 굿, 작은 굿, 비념이 있다. 큰 굿은 심방(무당)을 위시해 심방을 거드는 작은 무당 등 여럿이 참여한 가운데 젯상을 제대로 갖추고 모든 연물(악기)을 울리면서 밤낮으로 3~4일 진행되는 굿을 말한다. 길게는 일주일에서 열흘까지 굿을 하기도 한다. 작은 굿은 심방 한 두사람이 간단히 젯상을 차리고 하루나 이틀 사이에 끝내는 굿이다. 비념은 심방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당을 찾아가서는 신들이 좋아하는 제물을 바친다. 제물로는 메(밥), 떡, 과일, 술, 고기 등을 쓴다. 고기는 주로 바닷고기를 쓴다. 당에 갈 때는 대개 옥돔을 구워 간다. 그리고 신목(神木)이나 울타리 등에는 명을 길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은 '멩실', 신들이 쓸 돈인 '지전', 신들이 옷을 지어입을 옷감 '물색'도 제물로 걸어놓는다.

한림읍 상명리 '느지리 캐인틈당'

당에는 정해진 제일(祭日)에 찾아가거나, 택일을 해서 가기도 하고, 필요할 때 수시로 찾아가기도 한다. 정해진 제일에 따라 일뤳당(7일) 여드렛당(8일) 오일당(午日) 축일당(丑日) 술일당(戌日) 등으로 당을 분류할 수 있다. 정해진 제일에 가서 굿을 하거나 제를 지내면 효험이 크다는 것이다. 제일은 마을의 생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뤳당과 여드렛당은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 어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물때'와 깊은 관계가 있다. 목축이 생업인 마을에서는 소날(丑日)이나 말날(午日)을 길한 날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황다리궤당은 축일당이다. 축일당은 애월읍 한림읍 한경면 등 제주도의 서북부지역에만 있다.

우리는 황다리궤당을 떠나 역시 축일당인 한림읍 상명리 '느지리 캐인틈당'으로 이동했다. '느지리'는 상명리의 옛 이름이고, '캐인틈'은 당의 형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흙을 캐내어 틈이 생긴 모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제주도 당신앙의 계통을 분류해보면 송당계, 금악계, 예래계로 나눌 수 있다. 제주도 당신(堂神)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구좌읍 송당리 본향 외에 한림읍 금악리 본향과 중문의 예래동 본향도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던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누군가 이사를 하게 될 때 새로 당을 마련하고 이전에 모시던 마을 당신의 딸이나 아들신을 당신으로 모시게 된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전 마을의 당신을 그대로 모시기도 한다. 이를 '가지 갈름'이라고 한다.

금악리 본향당 본풀이에 금악계의 '가지 갈름' 현황이 나타난다. 금악리 본향당에는 사냥꾼인 최지국의 아들과 정좌수의 딸이 위 아래로 나뉘어 정좌했는데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7남매가 모두 한림지역의 당신이 된다. 느지리 캐인틈당은 셋째딸이 가지 갈라 좌정한 당이다.

느지리 캐인틈당에는 제물이 놓여있지는 않았지만 낙엽이 깨끗이 청소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여전히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당의 본풀이는 한경면과 대정읍까지 근처 마을 당신들의 이름만 나열하고 있을 뿐 당의 내력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당이 사라진 당오름

이름만 남아있고 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곳이 있다. 안덕면 동광리의 당오름이다.

제주도내에는 4개의 당오름이 있다. 조천읍 와산리, 구좌읍 송당리, 한경면 고산리, 그리고 이곳 안덕면 동광리에 똑같은 이름의 오름이 있는 것이다. 다른 세곳의 당오름에는 모두 당이 있다. 와산 당오름에는 '불돗당', 고산 당오름에는 '당목잇당'이 있고, 특히 송당 당오름의 본향당은 제주 신당의 효시에 해당한다.

그런데 안덕면 동광리에서는 어떻게 이름만 남는 일이 일어났을까? 관심있는 이들이 당오름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은 찾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4.3 당시 당오름 주변의 마을들이 불에 타고 양민학살이 일어나는 과정에 당도 없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도 하지만, 이 일대 주민들도 당오름에 당이 어디 있었는지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하고 있어 4.3 보다 훨씬 오래 전에 당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당이 사라진 동광리 당오름도 오름의 전형적인 모습은 간직하고 있다. 낮은 키의 소나무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 방목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민둥산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탐방에서 돌아오는 길에 외국인 참석자가 훼손된 당 얘기를 꺼냈다. 제주시 오등동 죽성마을의 '설새밋당'이 지난해 크게 훼손된 것을 안타까와 하는 그는 제주무속을 연구해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테너 존스다.

지난해 다큐멘터리 영화 <제주 신당 이야기>를 발표한 미국인 조이 로시타노는 설새밋당 복원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로시타노는 "제주의 '당'은 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조물 중 하나다.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주의 당은 제주도의 가장 뿌리 깊은 정체성"이라고 이번 프로젝트의 배경을 설명했다. 로시타노는 "인류의 문화적 자산을 지키는 일에 함께 하자"고 도민의 관심을 당부했다. 신목이 잘리고 구조물이 부서진 설새밋당 훼손사건에 정작 제주도민들은 무덤덤한 반면 외국인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이채롭다.

누군가가 마구 부수어버린 당을 외국인들이 '인류의 문화적 자산'으로 평가하면서 복원을 제안한 아이러니가 제주의 문화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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