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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둑
책도둑
  • 홍기확
  • 승인 2015.02.23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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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72>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였다. 정확히 기억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유일한 기억이다.(담임선생님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여름방학. 정읍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책장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세계명작 100권 새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당시 형편에 아버지는 꽤나 큰돈을 썼을 테다. 나는 당시 한글을 겨우 뗐던 시기. 구구단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외웠으니, 꽤나 발달이 느렸던 것으로 기억난다.
 새 책을 보니 왠지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욕심이 다분히 반영된 깨알 같은 글씨. 결단코 중학교 수준의 문장. 권당 200여 페이지의 분량. 아버지는 이 100권 전집으로 나나 누나가 세상을 정복하길 바랐을 것이다.
 『죄와 벌』, 『쿼바디스』, 『우주전쟁』. 완역판 『춘향전』, 『난중일기』, 『금오신화』. 초등학교 2학년 수준에 맞지 않는 책들. 그렇게 내 독서인생이 시작되었다.
 몽테뉴는 말했다. “가장 싼 값으로 가장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 바로 책이다.”

 아버지는 책을 끊임없이 구해다 주었다. 얻어오는 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토바이로 동네를 왔다갔다하며 남들이 버린 책들을 주워온 것이었다. 내 수준이 아니었다. 먼지가 케케묵은 양장판 세계철학전집, 사상가전서 등 일반인이 읽어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러니 버린 것이다.
 여기에 삼촌들이 결혼해서 떠나며 남긴 책들, 이모들이 결혼하며 자취생활을 정리하다 건네준 책들. 책장과 책들은 나의 보물 1호였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서정윤의 『시집 홀로서기』. 나는 세상과 인생을 다분히 일찍 알아갔다.
 로오른 백은 『책 사냥꾼의 휴일』에서 말한다. “책을 수집하는 일은 모든 오락 중에서 가장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오락이다.”

 사실 이런 책들도 나에게는 부족했다. 새마을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헌책방에서 싸고 좋은 책을 사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그래도 부족해서 가끔씩은 헌책방의 밖에 나와 있는 헌책중의 헌책들을 문을 닫은 날 훔치기도 했다. 책도둑이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순수이성비판』, 『삼국유사』
 소설가 성석제는 말한다. “재능 있는 책 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 게 아니라 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나보다 수준 높은 책 도둑의 서고에서 동굴 속의 알리바바처럼 넋이 나가 서 있던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정선된 보물을 다시 훔침으로써 우리 책 도둑들은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며칠 전 아이를 위해 꽤나 많은 양의 책을 구입했다. 아무리 책을 사도 아이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TV를 안 보니 딱히 할 게 없을뿐더러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그에 상응하는 책을 읽게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많이 읽는 날에는 20권도 넘게 읽는다. 반복해서 읽더라도 읽을 만한 책들이 점차 줄어가는지 독서에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책들을 질렀다.

 그리곤 아이에게 주문을 걸었다. ‘책도둑이 되라.’고 말이다.

 책을 읽는 것은 도둑질이다.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지식과 지혜, 고민에 대한 정수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책의 내용을 상당부분 흡수하게 된다. 건전한 도둑질이다.
 물론 요즘은 빠르고 가벼운 책들도 많이 나온다. 그래서 책을 고르기가 너무나 힘들다. 도서관에서도 100권을 훑어보고 10권을 고르고 5권을 빌린다. 그 중 운 좋으면 2권, 보통은 1권을 읽는다. 예전에는 30분이면 책을 골랐는데, 지금은 1시간이 필요하다. 그나마 고르고 나서 읽어보면 속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전처럼 책 도둑질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까지 만난 인생의 고수(高手)는 모두 책도둑이었다.
 아버지는 주워온 책이라도 꼭 내가 없을 때 책장에 정갈하게 꽂아놓으셨다. 그 책들의 새로운 공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들쳐보는 책들의 자리였다. 지금도 다른 이에게 선물을 하려고 하면 책 선물부터 생각난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사방팔방 책장과 책들이 놓여있다. 아침 현관문을 열면 신문들이 놓여있고, 우체통에는 잡지가 놓여있다.
 우리 집은 책 도둑 소굴이고, 우리 가족은 전부 책도둑이다. 바늘도둑을 책도둑으로 키운 건 나의 아버지였다. 귀여운 아들 책도둑을 건장한 책도둑으로 키우는 건 내 몫이다.
 
 내가 구입한 책은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이다. 아이의 책상에는 새로운 책들이 올려지고 이내 책장에 꽂힐 것이다. 물론 장난감 선물보다는 환희가 덜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장난감 보다는 무언가를 훔치는 쾌감은 더할 것임을 확신한다. 왜냐고?

 도둑이 제 발 저리니까. 그 느낌 아니까.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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