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성’을 바탕으로 한 제주지역 지리·역사적 근원지이자 중심이다. 이곳은 제주 과거와 현실이 함께 포개진 역사문화공간이다.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도시공간이며 생활공간이다. 원도심의 동맥은 ‘옛길’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다. <미디어제주>는 제주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한 ‘옛길’을 취재, 역사·지리·건물·상권·문화·인물 등 삶과 기억의 궤적을 살펴보려한다. 이를 통해 제주 원도심 위상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재생과 미래설계를 찾아보려 한다. <편집자주>
과거 ‘제주성’ 안팎을 중심으로 제주시 원도심은 이뤄졌다.
제주성 일대는 탐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지역 정치·경제·사회·문화 중심지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원도심 옛길은 제주성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제주성은 언제 축조됐을까.
아직까지 제주성이 처음 축조된 때가 기록으론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탐라시대부터 이미 성이 쌓아졌을 것이란 추정만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 여러 학설·주장이 있지만 고려시대엔 성이 있었을 것이란 추론이 지배적이다.
사료에 제주성이 처음 등장한 건 조선시대 「태종실록」(태종8년 1408)이다.
이 책엔 “제주에 큰 비가 내려 물이 제주성에 들어와 관아와 민가가 물에 잠기고, 고식의 절반이 침수됐다”라고 했다.
그 뒤에도 제주성을 소개하는 사료로 「세종실록 지리지」, 이원진의 「탐라지」「탐라지초본」「제주읍지」, 유형원의「동국여지」, 김상헌의 「남사록」, 담수계의 「증보탐라지」 등이 있다.
그러다 제주성은 일제강점기를 맞아 식민정책의 하나로 헐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실은 심재(心齋)김석익(金錫翼)이 쓴 「탐라기년」(耽羅紀年)부록에 소개됐다.
1913년 북성루 훼철, 1914년 연상루(동성문루), 진서루(서성문루), 중인문(간성 북문) 등 훼철, 1915년 소민문(간성 남문)과 북성 철폐, 1923년 동성에 측후소개설로 이어진다.
이어 1926년부터 일제가 동부두·서부두를 만들고 산지포를 매립하는 산지항 축항공사를 하면서 제주성 3면 성담 상당부분을 바다에 매립함으로써 제주성체 대부분 철폐됐다는 것이다.
뒤이어 1927년 홍수로 남·북수구의 홍문이 붕괴되는 등 일제 강점기에 제주성이 대부분 철폐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현재 원도심은 제주시 행정구역으론 일도1동·이도1동·삼도2동·건입동 지역을 통틀어 말한다.
이 지역에 남아 있는 옛길은 최소한 40여개를 넘는다. 길 이름은 모두 ‘~골’로 불렀다.
일도1동(一徒1洞)은 동문로터리 서북쪽과 동남쪽 일대에 이뤄진 마을이다.
조선후기엔 제주목 중면 일도리(一徒里 일내마을)로 불리다 1955년 시제 실시로 제주시에 편입돼 일도동(一徒洞)으로, 1979년부터 일도1동이 됐다.
일도1동에 있는 옛길은 내팍골(산지천 동쪽 동문시장 일대), 구명골(동문시장 안 옛 동부교회~옛 동양극장 뒷골목), 소로기 동산, 운주당골, 샛물골, 창신골, 칠성골,, 막은골, 해짓골, 산지목골, 알생깃골, 배부른동산, 고령밧,성굽 등이 있다.
이도1동(二徒1洞)은 남문사거리 동쪽과 삼성혈 남쪽 일대를 말한다.
조선후기엔 제주목 중면 이도리(二徒里 이내마을)이었다가 1955년 이도동(二徒洞)에서 1979년부터 이도1동으로 부르고 있다.
이 지역엔 두목골(일명 도목골, 중앙로 중간지점 동서로 종합시장에서 한짓골에 이르는 길),오현단, 웃생짓골(향교로 가는 윗동네길), 알생깃골, 새병골(중앙로에서 옛 남양방송 앞), 모홍골(삼성혈 주변마을), 항골(일명 향골, 두목골에서 동쪽으로 뻗어 오현단 서쪽), 남문골, 웃한짓골,알한짓골, 몰항골, 이앗골, 검정목골 등이 옛길이 있다.
삼도2동(三徒2洞)은 관덕정, 제주목관아지 주변과 그 서쪽·북쪽 일대 마을이다.
조선후기에 제주목 중면 삼도리(三徒里 삼내마을)이라 불리다, 1955년 삼도동(三徒洞)에서 1983년부터 삼도2동으로 됐다.
이곳엔 객사골, 막은골, 묵은성, 영뒷골, 창뒷골, 서문한질, 삼청골, 동불막골, 서불막골, 병목골, 채수골 등 옛길이 있다.
건입동(健入洞)은 제주항 주변과 동문로터리 동북쪽, 사라봉 서쪽 일대를 이룬 마을이다.
조선후기 이후에 건입리(健入里)로 불리다 1955년 동이 됐고 1962년 동제실시로 건입동이 됐다. 산지천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산지’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제주 원도심 옛길은 언제 생겼을까.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76·제주특별자치도문화재위원)은 “생긴 지 최소한 600년은 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이는 제주 원도심 옛길이 제주성이 만들어질 때 함께 생겼고, 제주성은 사료에 처음 등장한 「태종실록」(1408년)이전인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옛길 가운데도 오래된 길은 이보다 훨씬 전에 생겼을 것이고, 아울러 ‘새병골’등 병영이나 관아와 관련된 길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길(이른바 신작로)이 만들어지면서 옛길에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일제 때 새로 만든 길을 보면 관덕정을 통과하는 동문한질에서 생직골,서문한질로 이어지는 동서관통도로, 제주북초등학교 앞을 지나는 북신작로(북신로), 동부두길을 개통하며 만든 산지로 등이다.
그 당시 관덕정 앞에서 동문교까지 난 길인 원정통(元町通, 뒤에 관덕로)이다.
산지로는 일제가 동문로터리를 군수기지화하려고 동부두길 개통하면서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새로운 길이 나면서도 옛길은 나름대로 보존됐고 원도심은 제주 중심지 몫을 했다.
하지만 8.15광복 이후부터 원도심 옛길은 확장·파괴의 길을 가게 된다.
제주시는 1960대부터 시작된 확장 중심 개발정책과 1980년대 새로운 택지개발로 외형은 넓어졌지만 기존 원도심은 쇠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974년 제주시 1차 도시관리계획에 따라 연동 신시가지 개발 이른바 신제주개발이 시작되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뒤이어 연동·노형지구 확장과 화북·삼양지구 개발 등 숱한 신시가지 개발로 원도심은 쇠퇴의 길은 더욱 급격해졌다.
이 같은 커다란 변화 속에 크고 작은 아기자기한 원도심 옛길이 만들었던 제주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
나날이 변하는 도시의 진화 속 뒷 언저리엔 건물·길과 같은 물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궤적과 기억도 함께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도심 옛길과 골목을 빨리 보존해야 한다. 도로를 확장하면서 무분별하게 옛길이나 건물을 없애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김익수 위원은 ‘파괴 위주 행정’을 경계한다.
김 위원은 “그리스나 영국에 가면 천년된 길을 잘 보존하고 있다”며 “도로를 만들 땐 다른 곳으로 하지, 옛 오래된 골목은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전한다.
이어 김 위원은 “「세종지리지」에 나오는 마을인 신촌· 귀덕·애월·홍로촌(서홍리) 등은 600년된 마을로 600년 기념 비석을 세워야한다”며 “이는 마을에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제주시 원도심 옛길은 확장하거나 폐쇄하지 말고 살려서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은 ‘우리 정체성 확립’에 있다.
<하주홍 기자 / 저작권자 ⓒ 미디어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