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4:43 (금)
그림일기
그림일기
  • 홍기확
  • 승인 2015.02.03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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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71>

 초등학교의 방학숙제에 일기가 빠질 수 없다. 매일매일 쓰는 게 숙제다. 하지만 매일 쓰는 건 만만치 않다. 어른에게 방학숙제를 내주며 매일 30분 동안 글 한 편을 쓰라고 해보자. 아니면 백번 양보해서 매일 30분 운동하라고 해보자. 백발백중 밀린다. 필경 한달 치 글을 900분 동안 30편 쓰던지, 운동을 5시간 3일 연속으로 하고 친절한 119 구급차에 실려 갈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 글쓰기 습관을 위한 일기쓰기라고 한다. 하지만 방법론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규칙적인 생활을 위해선 8시 기상, 9시 취침이 숙제가 되어야 한다. 글쓰기 습관은 ‘감명 깊은 책’을 읽은 후 독후감 쓰기 정도가 되어야 한다. 소위 수필가라는 나도 쓰고 싶을 때 왕창 쓰고, 쓰기 싫을 때는 쓰지 않는다. 매일 쓰라고 누가 강요하면 글쓰기를 때려 칠 것이다. 일기도 그 날 쓰고 싶을 때 쓰고, 독후감도 비리비리한 책은 차치하고 감명 깊게 읽은 책만 쓰는 게 맞다.

 그러나 아이에게서 내 생각에 대한 반전이 일어났다. 이녀석 매일매일 일기 쓴다.
 오늘은 심지어 어제 너무 졸려서 일기를 못 썼다며, 앞으로는 미리미리 쓰겠다고 결심을 밝혔다. 어라? 설마 습관으로 됐나? 사실 아이는 지난 1년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썼다. 진정으로 경의를 표한다. 독한 녀석! 지독한 녀석! 냉혈한!
 그래도 ‘그림일기’ 중에서 ‘그림’은 그리기가 싫단다. 왜냐고 물어봤더니 그림을 못 그려서라고 대답했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드디어 아빠가 나설 때다!

 “아빠는 학교 다닐 때 그림 엄청 못 그렸고, 지금은 어른인데도 못 그려. 일기는 그림일기도 있고, 사진일기도 있고, 글씨만 있는 그냥 일기도 있어. 네가 쓰고 싶은 일기를 쓰면 돼. 아빠는 어른 되서도 그림을 못 그리니까 글씨만 쓰잖아.”

 그러곤 내가 두 달에 한 번 기고하는 제주건강가정위탁센터의 잡지, 『아이누리』에 실려 있는 글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 봐. 아빠 이름 옆에 뭐라고 돼 있어? ‘수필가’지? 이건 글씨만 쓰는 사람이란 뜻이야. 아빠 글에는 글씨밖에 없어. 하지만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고, 사진작가는 사진을 잘 찍어. 화가는 어렸을 때 그림일기를 썼을 거고, 사진작가는 사진일기를 썼을 거야. 너는 그림을 못 그린다고 했으니, 이제 그림 그리지 말고 글씨만 써.”

 그러자 아이는 심각해졌다.

 “아빠, 그런데 그림일기장에는 글씨 쓸 데가 네 줄 밖에 안 되는걸?”

 나는 살짝 흥분했다. 급작스레 한비야의 책제목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가 떠올랐다. 계란껍질을 깨는 병아리도 머릿속에 연출되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 안에서 쪼고, 부모가 밖에서 보조를 맞추어 알을 깨준다는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고사성어도 떠올랐다.
 나는 말했다.

 “꼭 글씨를 네 줄 안에만 넣어야 해? 그림 그리는 넓은 칸에도 쓸 수 있잖아.”

 아! 멋지다! 해냈다! 잘했다!

 오늘 아이는 그림일기의 테두리를 모두 부수었다. 글씨는 커졌다 작아졌다 난리다. 그림을 그리는 칸에도 글자들이 가득. 일기의 한 장을 모두 글자로 메웠다.
 김왕기 전남대 명예교수의 책, 『참 행복의 삶을 위하여』에 보면 이런 글귀가 보인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입니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만큼은 난 아빠 노릇을 했다. 아빠답다. 자책 따윈 없다.
 물론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가 정말 아빠다운지 자책할 때가 반드시 수 만 번 올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예측할 수가 없다. 잔잔하다가도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치며, 태풍이 부니까.
 엄마는 아이를 낳고 ‘주로’ 키우며 사랑을 유산으로 남긴다. 하지만 분명 아이를 키우는 데 아빠 역할이 있다고 본다. 부모(父母)라는 단어는 전 세계에 공통으로 있다. 엄마와 아빠는 육아에 있어 반반씩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느낀 바는 이렇다.
 엄마는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랑을 남긴다.
 아빠는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추억을 남긴다.
 내 아이도 언젠가는 자신의 아이가 그림일기를 쓰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 때 내 아이는 엄마의 ‘어서 일기 써야지.’라는 잔소리에 담긴 사랑을 느낄 테다. 그리고 아빠가 말한 ‘꼭 글씨를 네 줄 안에만 넣어야 해?’에 담긴 추억을 늦게나마 느낄 것이다.

 

▲ 홍기확 객원필진 <미디어제주>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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