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8:58 (목)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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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기확
  • 승인 2015.01.26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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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69>

 결혼한 지 꼬박 10년. 아내에게 방석을 선물했다. 차가운 바닥에 잘 앉지 못하는 아내. 지금 쓰고 있는 방석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샀던 것인데, 세월의 무게와 아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 헤져 있던 터였다. 소박한 결혼 10주년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의 가치는 돈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소운 수필가의 글, 『가난한 날의 행복』은 가난과 행복, 사랑을 절묘하게 조화한 글이다.
 아내가 직장을 나갔다. 쌀은 떨어졌다. 남편은 실직했다. 아내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들어왔다. 남편은 밥상을 차리고 어딘가로 나간 모양이다. 밥상에는 밥 한 공기와 간장 한 종지가 놓여있다. 밥상 귀퉁이에 짧은 편지가 놓여있다. 아내는 읽어 내린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 두오.”

 아내는 왕후보다 더한 행복감에 눈물을 흘린다. 가난. 행복. 사랑. 이 단어들은 돈의 절대량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할 때 남자들이 하는 흔한 말은 대충 두 개로 집약된다. ‘행복하게 해 줄게.’와 ‘오빠 믿지?’다. 나 같은 경우는 둘 다에 해당되지 않았다. 슬픈 일이 많았던 아내에게 ‘이제 울지 않게 해줄게.’라는 프로포즈를 했다. 물론 사족(蛇足)도 붙였다. ‘울더라도 그런 경우가 많지 않게 해줄게.’ 이 얼마나 낭만적이지만 현실적인 프로포즈인가! 궁즉통이라고 궁하면 통한다하지만, 그래도 빠져나갈 구석은 마련해야한다. 손자병법의 마지막 36계는 ‘줄행랑’ 아니던가?
 프로포즈대로 울고 웃는 결혼생활이 되었지만, 그래도 웃는 일이 더 많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웃을 일이 더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어령 수필가의 글 『삶의 광택』에 멋진 글귀가 있다.

 “구두닦이 아이들이 부드러운 솔질을 하고 구두에 최종적인 광택을 낼 때, 사람들은 그 순간, 그 부드러운 작업이 끝났거니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바로, 그 억척스러운 손이 다시, 반짝거리는 구두 표면에 구두약을 칠해 광을 죽이고, 또 문질러 가죽 뒷면까지 구두약이 배어 들 게 하고, 가죽 맨 깊은 곳에서 빚어지는, 이중의, 정말 최종적인 광택이 솟아나게 한다.”

 남들이 구두에 광택을 낼 때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두닦이는 다시금 광을 죽이고 또 광택을 낸다. 산으로 치면 정상을 가기 위해 작고 큰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과정이다. 결혼으로 치면 울고 웃고 하며 결국에는 생(生)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과정이다.

 결혼 10주년으로 사준 방석이 아내에게 불편하단다. 예전의 낡은 방석에 다시 앉는다. 나는 새로 산 방석을 버리기 아까워 요즘 이 동그랗고 폭신한 방석을 안고서 잔다.
 결혼 10주년 선물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선물은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성공하거나 실패하더라도 사랑의 온도계 눈금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아내는 모피코트를 바라는 속물이 아니고, 나는 모피코트를 사 줄 수 있는 부자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선물을 통해 가난한 날의 행복을 느끼며, 삶의 광택을 더했을 뿐이다.
 
 이 글은 어찌 보면 선물 실패에 대한 36계 줄행랑이며, 어찌 보면 나다운 방식의 연애편지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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