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6 17:57 (화)
고수(高手)들의 채찍질
고수(高手)들의 채찍질
  • 홍기확
  • 승인 2015.01.15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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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65>

 #1

 지난주.
 모 대학의 학장을 지내시고 지금은 은퇴하신 교수님의 병문안을 갔다. 한 시간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았다.
 학장님의 후배 교수가 급한 해외출장으로 그의 강의를 땜방하게 되었단다. 강의 주제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사회적 기업은 영리기업과 비영리기업의 중간 형태로, 사회적 목적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 재화·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조직)을 말한다.
 학장님은 행정학을 가르치셨고, 행정학개론까지 펴내셨던 전문가였다. 그런데 이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을 그 때 처음 들어봤다는 것이다. 이 다음부터가 기가 막히다.
 학장님은 공부는 평생토록 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서점에서 사회적 기업에 관한 책들을 사들여서 보고, 인터넷으로도 최근 동향을 파악하고 공부하신 후 강의를 수락하셨다. 병원의 천장을 그윽이 올려다보시며 한 말씀 하신다.

 “기확씨,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다 공부하지 못한다는 말 있지?”

 이 교수님의 나이는 72세. 나는 거의 절반인 37세. 나 역시 공부는 평생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향후 35년 동안 내가 ‘답습(踏襲)’해야 할 모습을 학장님에게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대로 따라만 해도 뭔가는 될 것 같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교통사고 당한 게 하늘이 내가 봉사를 적게 한다고 벌을 내린 것 같아. 지금까지 한다고는 했지만 재능기부라도 더 많이 해야겠어.”

 재능기부라. 교통사고 당해 누워있는데 앞으로는 전화위복을 삼아 봉사를 더 하겠다? 지독한 능력의 겸손과 더불어 초특급울트라캡숑따봉 긍정 마인드다. 내가 졌소이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오른다.

 ‘비관주의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보고, 낙관주의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본다.’
 

 #2

 지난달.
 해외연수를 갔을 때다. 인도네시아 바탐섬을 방문했다. 가이드는 인도네시아 현지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한글 이름을 ‘김국진’이라고 했다. 얼핏 보니 광대뼈가 돌출되고 키가 아담한 게 비슷하다.
 그는 재미있는 농담과 해박한 한국 문화 지식을 일정 내내 쏟아 부었다. 우리나라 사람도 모르는 역대 대통령 이름을 1대부터 현재까지 읊고, 한국의 각종 이슈들을 풀어재꼈다. 동승한 사람들은 찬사를 금치 못했다. 더욱 놀라운 건 지금까지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어떻게 이런 지식이 있고, 한국어를 잘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김국진’은 단 네 문장으로 청중을 압살시키고 숙연하게 만든다.

 “장남입니다. 동생들이 6명이에요. 어깨가 무거워요. 열심히 공부했어요.”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와 퍽이나 비슷했다. 그는 형제들 중 가장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혼자서만 대학을 갔다고 한다. 현재 나머지 동생들은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고기를 낚는 어부라고 한다. 한국어는 책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회화는 아리랑 TV와 한국인 친구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말 속에 뼈가 있다. 그의 말 못할 고민과 겪었을 고난, 행했을 노력이 모두 느껴진다. 그의 성공을 빌며 나의 나태함을 비난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서버의 말이 떠오른다.

 ‘부지런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미 역시 부지런하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부지런한가?’


 #3

 2006년.
 답사를 할 때다. 버스에서 신용철 경희대 박물관장님이 조심스레 책을 한 권 집어 들며 말한다.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李卓吾)』란 책이었다.

 “대학교. 철이 없을 때 탁오 이지(卓吾 李贄·1527∼1602)에 빠져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조금 알게 되어 책을 냈습니다. 부끄럽지만 혹여 시간이 나시면 읽어주십사 하고 소개 올립니다.”

 오호! 게으르셨네요. 69세가 되어서야 공부한 결과물을 책으로 내시다니요. 나는 어떤 내용인가 싶어 답사를 마치고 책을 구입해 보았다.
 이런! 출판사 서평을 보니 이탁오 평전은 국내 학자로서는 최초 저서였다. 또한 관장님은 1960, 70년대 독일에서 석박사를 모두 이탁오로 받고 40년을 연구, 관련 논문만 25편을 쓰셨단다. 하지만 책은 달랑 1권.
 겸손의 극치다. 이탁오 한 명을 40년 동안 오롯이 연구해서 69세에 책 한권 낸 게, 철이 없을 때 빠져들었으나 이제 조금 알게 되어 책을 내셨다구요?
 당시 내 가슴속에 호랑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공을 키워야겠구나.
 미국의 소설가, 매들린 렝글의 말이 떠오른다.

 ‘현재 자신의 나이에 스스로를 가두고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모두 잊는다면, 삶의 진실을 축소하는 것이다.’
 

 #4

 삶이란 게 다 그렇다.
 능력과 겸손은 항상 1대 1로 대응되거나, 꼭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의미로 내가 가진 능력이 1이라도 남들이 그것을 1로 보는 것도 아니다.
 나는 현재 거품이다. 어쭙잖은 잡기(雜技)로 세상과 사람들을 현혹시켜 왔다. 거품이 꺼지면 알몸이다. 가진 게 거의 없다.

 말은 평균적으로 1시간에 50km를 달린다. 시속 50km이다. 또한 평균적인 말은 하루에 100km를 달릴 수 있다. 이 경우 매일매일 달려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경우엔 1시간에 80km를 달린다. 시속 80km이다. 또한 이들은 하루에 200km를 달릴 수 있다. 이른바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고사성어가 어울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나흘 정도 전력을 다해 달린다면 대부분의 말은 800km를 다 채우지 못하고 지쳐 죽는다.
 
 나는 평균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인지, 채찍질을 당해 본인의 능력 한계를 벗어나 거칠게 숨을 쉬며 달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나는 지극히 평균적인 인간이지만, 항상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여러 고수(高手)들이 채찍질을 해 대고 있다.
 하지만 채찍질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나. 변태?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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