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갈등(葛藤)과 다양성
갈등(葛藤)과 다양성
  • 홍기확
  • 승인 2015.01.14 10:5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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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64>

 제주의 원시림인 곶자왈을 다녀왔다. 원시인이 된 기분이다. 문득 아름드리 나무를 살펴보니 얇은 칡나무가 뱅뱅 돌아 올라가 있다.
 칡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칡나무는 혼자서 생존하기 보다는 이렇듯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경향이 있는 나무다.
 그런데 칡나무 줄기를 보니 옆에 죽어서 말라 있는 등나무가 보인다. 등나무는 칡나무와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무를 타고 가는 나무다. 결국 등나무는 먼저 나무를 올라탔는데, 칡나무가 등나무 위로 자라면서 압박하여 죽게 된 듯싶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자라는 칡나무와 등나무. 같은 습성과 다른 방향. 이들은 필연코 만나며, 반드시 둘 중의 하나를 죽이게 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칡나무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합하여 ‘갈등(葛藤)’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아름드리 나무에 있는 자국들이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칡나무와 등나무가 죽어서 생긴 수십 개의 자국들이었다. 흐릿한 것, 선명한 것, 이들의 방향은 왼쪽으로 감긴 것과 오른쪽으로 감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칡나무가 등나무를 죽이면 다음에는 등나무가 칡나무를 죽임으로 인해 생긴 자국들이었다.
 지금은 칡나무가 올라타고 있다. 등나무는 허리가 잘리고 팔다리가 끊어진 채 썩어가고 있다.
 무심코 아름드리 나무의 밑둥을 보았다. 어린 등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이 녀석은 분명 몇 년 안에 칡나무를 죽일 것이다. 죽은 부모의 복수를 할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 담겨져 있다.
 일반 사람들은 그의 두꺼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진화론에 대해 오해를 한다.
 존 그리빈이 엮은 『한번은 꼭 읽어야 할 과학의 역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빠 기린보다 아기 기린이 목이 좀 더 길어진다? 다윈은 이런 시나리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론에 다르면 어떤 초식동물 세대든 목 길이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동료들보다 목이 더 긴 덕분에 더 많은 먹이를 먹을 수 있는 기린들은 더 오래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낳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선택이 긴 목을 더 선호한 결과 긴 목을 지닌 개체들이 더 많아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기린이라 부르는 생물이 된 것이다.」

 결국 진화론의 핵심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것이다. 다윈의 이론에서 약육강식(弱肉强食)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선택이란 개념이 더욱 강하다.
 다른 얘기도 더 들어보자.

 「복잡한 동물의 진화에는 미생물이 출현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과는 다른 독립적이고 확률이 낮은 사건들이 매우 많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복잡한 동물은 한번 진화하면 대량멸종하기가 쉽다.
 행성에서 동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허용한계 수준 이상의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행성의 역사동안 일어난 불가피한 대량멸종에서 동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선택의 핵심은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것이다.
 다양성의 핵심은 센 놈들은 한 방에 간다는 것이다.

 아이가 방과후수업 시간에 혼이 난 모양이다. 파워포인트를 배우는데 물고기를 한 시트에 수십 마리를 넣은 모양이다. 게다가 파란색을 좋아하는지라 배경도 파랑, 물고기도 파랑, 글자도 파랑으로 도배를 했단다. 방과후수업 강사는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만 하지 말라고 혼을 낸 모양이다. 아내와 나는 그러려니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일주일 후. 방과후 강사가 아내에게 심각하게 면담을 요청했다. 강사는 자신이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이 있고 관련된 강의도 하는데 내 아이처럼 파란색을 선호하는 아이는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문제가 있는 아이라고 했다. 교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내는 얘기를 듣고 난리다. 나에게 조르르 와서는 어떻게 하냐고 고민이다. 아이와 얘기를 해보라고 성화다. 나는 아이를 불러 얘기했다.

 “그냥 선생님한테 개겨. 파란색 좋아하니까 그냥 파란색으로 색칠하고, 물고기 좋아하니까 수십 마리 그려도 돼.”

 아이도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아빠, 근데 선생님이 물고기는 앞으로 한 마리만 넣으라고 했어. 다른 친구도 물고기 좋아하는 데 이제 똑같이 한 마리만 넣으래. 파란색은 이제 쓰면 혼난다고도 했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씨X’

 아이에게 다시 말한다.

 “물고기 좋아하면 수 십 마리 넣고 그냥 혼나. 파랑색 좋아하면 그냥 그걸로 다 그리고 혼나. 선생님이 다 옳은 건 아니야. 네가 하고 싶으면 혼나더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아빠도 뭔가를 너무너무 하고 싶을 때에는 선생님한테 혼나더라도 그냥 했거든.”

 선생님의 권위에 굴복한 친구가 모범생이 되고,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럼 사람도 있다는 다양성을 몸소 실천하신 내 아이가 패륜아가 될 가능성은 극히 적다. 아이들은 가소성(可塑性)이 있어 어디로 튈 줄 모른다. 어떻게 하나의 사건만으로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아이가 센 놈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된 놈이 되길 바란다. 센 놈들이 한 자연선택의 소용돌이를 뛰어넘어 다양성 속에서 살포시 생존할 수 있는 된 놈이 되길 바란다. 한 나무에서 죽고 죽이는 갈등(葛藤)을 펼치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나무를 찾아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틀기를 바란다.

 내 얘기를 들은 아이는 다음날 학교에 돌아갔다.
 파워포인트로 수족관을 만들었다.
 수족관은 파랑, 당연히 물은 파랑색, 물고기는 원래 등 푸른 생선임.
 다른 친구는 그 날 물고기를 한 마리만 넣었다고 한다.
 역시 내 아들이다. 잘 개겼다. 훌륭하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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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2015-01-17 09:02:02
와 대단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잡아냈을까

홍기확 2015-01-16 19:10:54
'배움'님의 덧글 내용보다는 느낌표 갯수가 더 시선이 가네요.
첫문장의 느낌표는 두 개..
두번째 문장의 느낌표는 세 개...
원래 이런건 현미경으로 봐도 잘 안보여야
일반적인 지구인인데....
의도는 점층법? 강조법? 오타? 설마, 음모?
10분째 분석 및 추리중.....
쩝.
연구 결과는 네이처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으로 시간 날때 게재하겠습니다.

배움 2015-01-16 17:31:35
아들에게 당당히 자기 생각을 실천하라는 멋진 아빠의 멋진 응원!! 배우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