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기다림과 불편함의 가치
기다림과 불편함의 가치
  • 홍기확
  • 승인 2015.01.12 14: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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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63>

 편지가 이메일이 아닌 편지였을 때가 있었다.
 편지가 당일 배송이 아닌 여유만만 배송이었을 때다. 보낸 편지를 기다리고, 상대방은 편지를 쓰고 다시금 나에게 보낸다. 편지를 보낸 후 두근두근 기다린다. 나의 말에 어떤 답장을 보낼까? 편지는 잘 도착했을까?
 1주일이 지나면 살짝 불안해진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다가 편지가 도착한다. 안도하며 조심스레 편지를 뜯어 내용을 읽는다.
 아내와 나눈 연애편지는 둘의 편지를 합쳐 600통이 넘는다. 나나 아내나 장문의 편지를 쓴다. 편지지로 10장을 보통 넘긴다.

 사진이 디지털 카메라나 셀카가 아닌 사진이었을 때가 있었다.
 꼭 필요한 사진을 찍고 그 중에서도 꼭 필요한 사진을 인화했다. 그렇게 인화된 사진은 앨범첩에 소중히 들어가 있다.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수십 번 들쳐보고 추억을 떠올린다. 그 안에는 동네친구, 산동네 아줌마와 그들의 자식들, 돌아가신 할머니, 친척들이 숨 쉬고 있다.
 2005년. 140년 전통의 아그파 포토는 파산했다. 2012년. 필름을 제조하던 코닥필름도 숨을 꼬딱꼬딱 쉬다가 결국 파산했다. 그렇게 필름은 사라졌다. 이제 추억은 사진이 아닌 ‘파일’로 담기게 되고 우리는 여간해서는 파일을 들춰보지 않는다. 수만 장의 파일들은 사진이 아닌 저장장치에 담겨져 생명을 잃는다.

 요즘은 무슨 일이 있으면 휴대폰을 먼저 괴롭힌다.
 본래 기억력이 저질이지만, 소소한 기억의 실수를 할 때나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휴대폰의 각종 일정관리, 가계부, 계산기 앱들을 삭제한다. 그리고는 10년째 쓰는 다이어리로 회귀하여 구태여 손 아프게 각종 일정, 메모, 생각들을 옮겨놓거나 기록한다.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때는 페이스북의 ‘좋아요’가 싫어 삭제한다. 카카오톡의 가벼운 대화, 부담스런 단체대화가 싫어 삭제한다. 오름을 올라가서도 일부러라도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추억과 느낌을 고스란히 마음에 간직하고, 청량한 바람을 몸으로 느낀다.
 
 아내에게 휴대폰을 괴롭혔다고 말한다. 휴대폰의 바탕화면이 깨끗해졌다. 아내는 흠칫 놀라며 말한다.

 “다 지워도 카톡은 지우지 마! 공짜잖아!”

 공짜? 얘야.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니?
 아이에게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늘상 말한다.
 분명 공짜, 편리, 속도에는 얻는 이로움도 있지만 잃게 되는 소중한 가치도 있다.

 대가족이었던 우리 집. 어렸을 적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은 우리 집이 거의 유일했다.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각종 경조사를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전화기는 필요했지만 당시 형편으로는 과도한 투자였다. 당시 전화요금은 지금 ‘공짜’ 음성통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쌌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우리 집의 전화번호가 자기들의 전화번호였다. 전화가 와서 보면 김서방을 찾거나, 영숙이 엄마를 찾는 남의 집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전화가 왔다. 누군지 관등성명을 댄 후, 누구를 바꾸어 달라고 한다. 나는 전화를 끊고 김서방 댁으로 달려간다.

 “김씨 아저씨, 여수 어매라고 전화왔어요.”

 김씨 아저씨는 감던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슬리퍼를 급히 신고는 무작정 달린다. 나도 덩달아 달린다. 마루에 걸터앉은 김씨 아저씨는 여수로 전화를 한다. 통화는 극히 간단하다.

 “어매요, 무슨 일이당가요?”

 여수 어매의 답변은 3초도 진행되지 않는다. 김씨 아저씨의 반응도 쾌속이다. 전화요금의 힘이다.

 “알았응께 닐 모레 갈란다요.”

 통화가 끝났다. 김씨 아저씨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홍씨 아재, 여수에 있는 동생이 아들 낳았지라!”

 아버지의 얼굴 뿐 아니라 우리 집안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아버지는 말한다.

 “김씨, 축하하네! 너네 동생 딸만 셋이라 했지?”

 동네는 축제다. 서울 산동네는 달이 뜬다. 들뜬다. 김씨 댁 아주머니는 형편에 맞는 고구마를 가져와 전화비를 대신한다. 군고구마를 기가 막히게 구워 왔다.

 길거리의 공중전화들은 공중분해되고 있다. 휴대폰은 음성통화를 무료로 하니, 한 마디 한 마디의 가치가 쉬워진다. 전화로 통화하면 요즘 같은 시절에 뭐 일일이 통화를 하냐고 문자로 보내라고 핀잔이다.
 영혼이 없다. 설렘이 없다. 가치가 없는 공짜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가끔은 편지를 쓰고 싶다. 빛바랜 사진이나마 갖고 싶다. 그리고 화려한 가요가 나오는 벨소리가 아닌, 진정한 전화기의 ‘따르르릉’ 소리를 듣고 싶다.
 느리고 불편하지만 이게 가치다. 기다림과 낭만과 추억이 있는 이것이 가치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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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 시대 2015-01-14 11:08:21
수많은 기계와 문명이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못보게 하죠.
저도 집에 가면 휴대폰을 방 구석 멀리 보내버립니다.
넘쳐나는 정보와 소통의 대표주자 SNS가 인간의 따뜻한 대화와 진정한 소통을 차단시키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홍기확 2015-01-14 13:38:47
수많은 기계는 편합니다.
하지만 가끔 불편하기도 합니다.
결국 문명의 이기가 편한건지, 불편한건지?

밥상머리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친구, 친척에게
충언을 합니다.
밥은 수.저로 먹지 휴대폰으로 먹는 거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면 얼굴보며 얘기하지 휴대폰 보면서 얘기하는 것 아닙니다.

인류 진화의 획기적인 사건은 과거 직립보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걷지 않고 문명의 이기로 이동합니다.
이제 진화의 혁명은 직립보행을 폐기하고
교통수단의 발달이 되어야 할까요?

넘처나는 정보에서 원석을 발견하려는 노력(무의미한 인터넷 서핑)보다
돼지우리속에서 진주를 찾기가 더 쉬운 일인 듯합니다.
디지털의 가짜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줄이고
사람에게 진짜 SOS를 청하는 게 더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