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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세계는 모르지만 우린 조선인과 사이좋게 지낸 추억 있지"
“어른들 세계는 모르지만 우린 조선인과 사이좋게 지낸 추억 있지"
  • 고하나 특파원
  • 승인 2014.12.18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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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고하나의 일본 이야기] 마츠시로 대본영을 가다 <7>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자료는 극히 적다. 당시의 자료가 패전과 함께 소각돼, 관계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처분됐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츠시로 공사를 몸소 겪었던 ‘지역 주민들 90여명 중 몇몇의 증언’ 을 간추려 ‘전쟁 후’를 중심으로 들어보고자 한다. (무기명으로 싣는 것에 대해 양해를 바란다.)

“대본영 이란 말은 몰랐다. 육군의 통신부가 온다는 식의 말은 듣고 있었다. 마츠시로소학교 체육관에도 엄청 큰 통신기기가 많이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니시죠지구에 천황폐하가 온다는 것도 들었다. 이런 구멍을 파는 것을 보면, 일본은 분명 전쟁에서 진거라고 말했다가 무지하게 혼났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죽는다고”

“조선인들이 귀국한 건 몇 년 정도였나. 울며불며, 떠나기 싫다고.. 조선 아이들이. 상당부분 돌아갔지. 배타고 북한으로도. 남은 사람, 마츠시로에 처음으로 파칭코했던 시미즈(일본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죽었는지… (그 부인이 고기집했던가?)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마츠시로의 지하궁전과 복도, 아사히신문 1945년 12월 15일 보도>

# 전쟁 후의 지하고

“전쟁 직후, 8월 24~25일 정도까지 천황의 지하궁전은 그대로였는데, 군대가 철수해서 아무도 관리하고 있지 않았다. 조금 지나니까 다다미, 바닥, 천장판 등이 없어져 버렸다. 아침 일찍 누가 짐수레(두세명이 끄는)에 싣는 걸 본 사람도 있다. 니시죠 지역이 도둑 동네라고 불렸을 땐 창피했다.”

“전후, ‘몇 명이 공사로 죽었는지 알려주라’고 조선의 사람이 열심히 정부에 요청을 했지만 ‘자료가 없다’고. 전부 정부가 처리해버린 거 아닌가? 근처 할머니가 (희생자를) 한데 묶어서 지하고 안으로 가뒀다나. 눈으로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얘기했을까?”

“상상만으로 얘기한 거 아냐? 사람이 죽었단 소리는 듣지 못했어.”

“당시는 절대 비밀이었으니까 알 수 없지.”

“전후에 바로, 전선을 태워 그 빛으로 지하고에 들어갔는데, 사람의 시체 같은 건 없었어. 묘지 비슷한 것도 없고, 그저 암석뿐이었어.”

“여기 절에 묘지는 하나 있었다. 폐석은 전쟁 후에 상당히 치웠지만(반 이상) 사람의 뼈가 나왔다거나 하는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지.”

# 남겨진 건, 쓰레기더미와 전염병

“전쟁이 끝나고 감독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할아버지랑 며칠동안 태웠는지. 밭 3~4군데에서 태웠는데, 매일이었다.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군부에 라디오가 없었으니까, 8월15일 방송은 한 주민 집에서 들었지. ロ(로)지구의 하류에는 티푸스랑 적리(이질의 한 종류)가 유행해서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숙사에 있던 사람 부인도 티푸스에 걸려 전쟁이 끝나기 조금 전에 퇴원했는데, 어떤 집은 한 가족이 다 죽기도 했어.”

<천황이 피난할 때 쓰기 위한 지하통로. 기상청정밀지진관측소 실내>

# 조선인들과의 교류

“조선인 노동자, 비번인 사람들은 도로를 건너와 산책하러 오기도 하고 여자들은 세탁할 것을 가지고 용수지에 왔다. 조선 노동자들도 우리들과 말을 하기도 했는데, 자신들끼리 대화는 조선어, 우리들과 말할 때는 일본어로 나눠 사용했다. 그걸보고 2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건 편리한 일이구나 하고 대단하다 생각했다.

당시 농가의 6월은 양봉, 보리의 수확, 모내기로 수면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안되는 한 가족이 총동원되는 바쁜 시기였다. 젊은 남자들은 징병돼 가고, 일손이 부족해서 눈에 핏발을 세울 정도의 매일이었다. 그때 가끔식 산책하는 모습을 보이던 조선인 노동자가 네다섯 와서 인근 모내기를 응원하러 와 주었다. 산책하러 와서 맘이 맞았는지 아님 근처 아저씨가 의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떠들썩한 모내기 풍경이 됐다.

‘늦어 늦어’ ‘경쟁이다.’ 아줌마들과 함께 노동자가 섞여서 왁자지껄했다. 

‘나는 감독이다.’ 논두렁에 줄을 쳐서 경계를 정해주던 남자가 큰 소리로 말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감독이 그렇게 좋니?’ 아줌마들은 말했다.”

“소학교 5학년일 때, 조선인 자제 2명이 들어왔다. 노무자의 아이들이었다. 도시락을 봤을 때, 한명은 흰쌀밥에 가까운 밥을, 한명은 수수밥을 먹었었다. 당시 우리는 거의 쌀 반 보리 반 정도의 밥이었다.”

“가끔 귀가하면 2~3명의 조선인이 들어와서 무슨일로 왔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 안하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집에 있는 야채같은 걸 줬더니 답례로 당시 집에서는 먹을 수 없었던 것을 받았다고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조선 아이들과 함께 놀았어요. 부추랑 파를 가지고 가면 조선인 부모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조선일 노동자 중에는 가족 단위로 일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학교 한 반에도 여자 아이들이 두명 있었고, 같이 공부했어요.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갈 때도 두 가족의 조선인이 운반작업 등을 도와줬습니다.”

“조선의 사람을 강제적으로 데리고 왔다는 건 들은적이 없었다. 새하얀 옷을 입고, 한 남자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땋은 머리를 한 것 같았다. 그게 허리춤까지 내려온 사람도 있었고, 우리집에는 조선 사람이 자주 놀러와서 친하게 지냈다. 모내기를 할 때는 우리 논두렁에 와서 서서 보기도 했는데, 자주 왔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에 돌아가기 전에는 집에도 왔다. 일본명은 미야무라, 이생원이란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먹는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독신인 사람도. 무척 추웠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밭에다 뭐든 길렀죠. 제일 많이 기른 것은, 마늘하고 후추. 그리고 내가 처음 맛을 본 게 지금 양상추라고 하잖아, 근데 동그랗게 되지 않는 거. 상추라고 했지 아마. 그게 맛있었다. 지금의 양상추랑은 조금 달라.

야채는 꽤 많이 기르고 있어서 배추를 조선식으로 담가 먹고 그런 적도 있었다. 나는 매운 거에 약하니까 먹지 않았지만.”

<조선인 가족 춘산씨 아이들(키쿠,우메)과 나(오른쪽)>

“어른들의 세계와 나라의 의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포함해 키쿠짱(국화) 자매는 우리 집 정원에서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뛰어 놀았지요. 형제가 없었던 나는 세 자매의 한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농번기라 학교가 쉴 때는 누에치기나 모내기로 흙범벅이 돼도 신경 안쓰고 해가 저물어 근처가 어두워질 무렵까지 도와줬어요. 그 다음엔 농가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하며 세 자매처럼 언제까지고 장난치고 그랬지요.

이런 때도 있었어요. 아빠 몰래 키쿠짱 집에 놀러가 수제 맥아당 사탕을 받아와서는 입 안에 넣었죠. 그때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빠한테 비밀로 했던 맛이기도 했고 너무 맛있었어요. 단맛에 굶주렸던 시대였죠.

설날이라고 하면 구정이었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민족의상을 입었던 여자아이들이 산해진미를 가지고 왔어요. 그때 그걸 본 우리 가족들은 정말 많이 놀랐지요. 먹을 게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소 당황했던 것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입는 옷도 당시에는 엄마의 기모노 등을 수선해서 다시 만든 멋없는 옷을 입는 게 보통이었죠. 하지만 키쿠짱(조선인 어린이)은 항상 몸에 딱 맞는 옷과 신발이었어요. 그래도 아이들 세계에서는 누가 어떤 걸 입는지 신는지는 중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요.

그때부터 60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어요. 그때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 그 가족들과 만나고 싶어요. 나라 대 나라 같은 얽히고설킨 미로 속에 들어가 버렸다해도, 눈과 눈을 보고 손을 잡고 얘기하면, 어린 시절 순수했던 날들이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이웃나라이니까요. 언젠가 꼭 그같은 날이 올 것을 마음속으로 빌고 있습니다.”

<무학산 남서부 사면에 남은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던 구멍>

“아이고, 아이고-“ 조선인의 통곡소리를 기억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저 탁주를 마시는 조선인에 대한 호기심, 혹은 조선인 아이들과의 즐거웠던 추억들.

조선인들과의 교류는 뿌옇게, 때로는 오롯이 기억의 한켠에 남아있었다.

# 발파의 폭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주민들에게 ‘고귀한 분이 온다… 역사에 남을 시설…’ 이라는 알림과 함께 찾아온 역사의 파편들. 이것은 푸르스름하고도 하얗던 재와 함께 시작됐다. 발파의 폭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현재 지진 관측소로 남아있는 곳 입구에서는 하루 종일 발파 소리가 났다. 입구쪽 암석의 파편은 멀리까지 날아왔다. 연말연시 관계없이 매일 그 소리가 끊임없었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집 안에 있는 장지가 덜덜 떨려서 밤 중에도 눈이 떠졌다. 폐석이 쌓인 곳은 지금도 역력히 남아있다.

“아이들 몇명과 놀고 있었을 때 첫 발파가 있어서 150미터 정도까지 작은 돌들이 날아왔다. 위험하다고 알리는, 깃발을 흔드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첫 발파니까 나무를 30㎝ 정도 두께로 막고 돌이 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었다. 다친 사람들, 희생자들 3~4명을 덧문짝에 거적을 덮고 실어 날랐다.

<지하고에서 판 폐석을 쌓아둔 장소. 니시죠보육원 남쪽>

# ‘조선인 강제연행’ 에만 중점을 두지 말아 달라

각 시민단체의 20여년에 걸친 운동의 결과,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에 관한 사실은 많이 밝혀졌다. 마츠시로 대본영 조선인 희생자 추도 평화기념비 유지관리위원회의 사무국장은 한국에 직접 가서 공사로 희생당한 조선인의 유족부터 시작해 이 공사에 관련된 사람을 찾고, 마음깊이 사죄를 드리는 등 꾸준한 조사를 계속해 왔다.

또한 연일 계속되는 방문객들에게 대본영 이전 공사에 관해, 그리고 조선인들이 고생한 사실을 전하는 사람들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 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생을 건 사람들의 귀중한 증언들이 발표됐으나 이 일에 동원된 지역 주민들의 증언은,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적은 인원에 국한 됐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선인 강제 노동에 의해 가혹한 노동이 부여되고, 몇천명의 조선인이 죽게된 공사로, 그들은 가축처럼 쓰여졌다” 는 시점 만으로 정리해 버리기엔, 마츠시로 공사의 진상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조선인들과의 교류’라는 측면 역시 마츠시로대본영 공사의 핵심에 포함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 본다.

왜일까. 주민들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듯 보였다.

<무학산지하고에 남겨진 노동자의 낙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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