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8 21:23 (목)
감국향기 녹아나는 사랑의 길을 가다
감국향기 녹아나는 사랑의 길을 가다
  • 고희범
  • 승인 2014.11.21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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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범의 제주이야기] 제주포럼C 제47회 제주탐방 후기

11월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중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시인 정희성은 '빛 고운 사랑의 추억'마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노래한다.
누구에게나, 어떤 것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리. 심지어는 2014년도 아직 한 달이나 남아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에 뜨거운 사랑의 흔적을 찾아가기로 했다.

한경면 용수리 바닷가 바위에 새겨진 '절부암'. 제주도에서는 유일하게 전서체로 새긴 마애석각이다. 바위 뒤에 서 있는 나무에 목을 멘 것으로 추정된다.

강사철의 처 고씨
 
한경면 용수리 바닷가 바위에 새겨진 '절부암'(節婦岩)은 18살 꽃다운 나이 한 여인의 사랑을 기리고 있다.
고응추의 딸 고씨는 헌종 1년(1835년)에 태어나 철종 4년(1853년) 18살에 강사철과 결혼한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 해 11월 남편이 차귀도에 대나무를 베러 갔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물에 빠지고 말았다. 고씨는 소리를 치고 곡을 하면서 바닷가를 이리 저리 돌았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잠수를 해 바닷속을 뒤지기도 했으나 어디서도 남편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당산봉 동쪽 자락에 묻힌 강사철과 부인 고씨의 합장묘.

여인은 이틀 뒤 바닷가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맸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 고씨가 목을 맨 나무 아래 수면으로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여인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해 시신을 찾은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기리며 당산봉 아래 좋은 자리를 잡아 합장했다. 마을사람들이 제주목사에게 열녀로 지정해줄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백성들에게 선행을 더욱 격려하여 권하게 하도록" 하는 수준으로 그 절개를 칭찬했다. 당시 이런 정도라면 열녀로 지정될 만한 일이었음에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마을에 열녀가 나면 마을에서 내는 군포(軍布)인 '동포'(洞布)가 면제되는 것이어서 제주목사는 이를 꺼렸을 수도 있다.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절부암 아래 바다가 매립됐다.

절부암 마애석각과 묘비에 눈의 띄는 직함이 있다. '판관'이다. 제주의 행정과 방위, 치안의 최고책임자인 제주목사에 이어 도내에서 2인자인 판관 신재우가 글을 지었다는 것이니 이 또한 흔치 않은 일이다. 여기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신재우는 고씨 여인이 숨진 지 10년 뒤인 철종 14년(1863년)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해 사헌부와 사간원을 거쳐 평안도 영변과 강원도 원주, 전라도 장성에서 찰방을 지내고 고종 3년(1866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한 인물이다. 그는 이후 고종 19년(1882년)과 1898년 두 차례에 걸쳐 대정현감에 부임하기도 했다.

절부암 마애석각 뒷면의 '판관 신재우 찬(撰)', 묘비 옆면의 '신재우 식(識)' 글자가 선명하다.

한경면 역사문화지(2007년)에 따르면 조천 출신인 그는 소년시절 제주향교에서 공부하면서 고씨의 일이 도내에 알려지자 크게 감동했지만 열녀로 공식 인정받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 과거에 낙방하던 날 밤 꿈에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사라졌다. 다시 과거 공부를 하면서 <열부전>을 읽다가 문득 고씨가 생각났다. 제물을 장만해 고씨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낸 일이 있었다. 한참 세월이 흘러 그가 제주판관으로 부임하게 됐다.
 
해남에서 제주로 오는 길에 파도가 높아 배가 진도에 머물게 됐다. 진도 객사에서 잠을 자는데 오래 전 꿈에 보았던 여인이 나타나서는 "첫 닭이 울거든 곧 떠나라"는 것이다. 깨어보니 꿈이었고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공을 깨워 배를 띄웠는데 산지 포구에 도착하자 폭풍이 불어닥치는 것이었다. 진도에서 늦게 출발한 배들은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려 침몰하고 말았다. 신재우는 고씨가 자기를 보살핀 덕분이라 생각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가 목 매 숨졌던 나무 아래 바위에 '절부암'이라 새기고 묘소에는 표절비를 세운 것이었다.
 
신재우는 두번째 대정현감으로 왔을 때 자신이 50냥을 내놓고 대정현 소속 관원들이 모은 돈 25냥을 고산리와 용수리에 37냥 5전씩 나누어주고 절부 고씨의 묘제를 지내게 했다. 40여년 동안 계속되던 묘제는 이 돈이 다 떨어져 한 때 중단되기도 했으나 3년 뒤 용수리 부녀회가 돈을 모아 구입한 밭 300여평의 소출로 제사를 계속 지낼 수 있었다. 지금도 해마다 고씨의 기일인 3월 15일이면 마을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홍윤애와 조정철
 
판소리 춘향가의 주인공 성춘향의 사랑 보다 더 곧고 애절한 사랑이 있으니 홍윤애가 그 주인공이다. 
'홍랑'(洪娘)이라 불리는 그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마침내 목숨을 바친 지고지순한 사랑의 화신이다. 애초 홍랑의 묘는 현재의 제주시 삼도1동 전농로에 있었으나 1936년 제주공립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이장됐다. 전농로의 일부 구역이 '홍랑로인 까닭이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제주 양씨 시조의 사당인 '건승원' 진입로변 동쪽에 외손주와 같은 산담 안에 묻혀 있다.

'홍의녀(義女)의 묘' 이장될 때 자손들이 묘소를 잘 보살필 수 있도록 외손주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언론인이자 향토사학자이던 고 홍순만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홍윤애의 집안은 고려 때 여러 대에 걸쳐 정승과 대신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15세기 초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는 홍윤강이 제주에 유배를 온 뒤로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금기로 삼고 농사를 짓거나 지방의 향리(鄕吏)를 지내는 정도로 살아갔다. 홍랑의 아버지 홍처훈은 입도 13세손으로 역시 향리를 지냈다.
 
조정철은 형조판서 홍지해의 딸과 결혼한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복잡했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동정해 그의 아들인 정조를 지지하는 노론시파와 이를 반대하는 노론벽파의 대립이 격렬했다. 조정 대신들 간의 대립을 넘어 정조를 시해하고 새 임금을 세우려는 모반사건이 발생하면서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사건은 바로 조정철의 장인인 홍지해 형제와 아들, 조카들의 주동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홍지해 형제를 비롯한 주모자 20여명이 처형됐다.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조정철의 부인 홍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조정철도 사형을 당할 뻔 했으나 증조부 조태채가 과거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점이 참작돼 제주 유배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조정철의 제주 유배는 참으로 기구했다. 할아버지의 형제들인 조정빈과 조관빈, 아버지 조영순이 이미 제주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50년 동안 3대에 걸쳐 네 사람이 제주에 유배를 온 것이다. 조정철의 유배는 27살이던 정조 1년(1777년)에 시작돼 제주목과 정의현을 거쳐 추자도까지 제주에서만 26년, 이후 전남 광양, 구례. 황해도 토산, 경기도 장단에서 4년 등 총 30년 동안 계속돼 조선조 최장기 유배생활을 기록했다.
 
조정철이 제주 유배기간 중에 쓴 시문집 '정헌영해처감록'은 홍윤애 사건과 관아의 감시, 제주목사의 무고로 인해 옥에 갇힌 뒤 죽을 고비를 넘기는 상황, 제주의 풍속과 물산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제주성안 신호(申好)의 집 바깥채에 머물게 된 그는 유배인에 대한 규정 대로 집 밖을 나서지 않은 채,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았다.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할 때도 임금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고백하고 있다. 다소 자유롭게 생활했던 다른 유배인들의 생활과는 달랐다. 그만큼 정적들에 의한 감시도 심했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생활수칙 8개 조항을 써서 벽에 붙여놓을 정도였다.
 
집안이 절딴난 그에게는 유배생활 동안 도움을 줄 가족이 아무도 없었다. 오직 집 주인 신호의 가족과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식사나 빨래 등 그의 시중을 들어주게 된 이가 홍랑이었다. 중죄인이었으나 시문에 뛰어난 홀아비 조정철과 그를 돕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홍윤애, 시간이 지나면서 20대의 남녀는 마침내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 사이에 딸도 태어났다. 
 
정조 5년(1781년)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상황은 심각해진다. 김시구는 노론의 거두인 조정철의 증조부 조태채를 죽음으로 몰아 간 소론 김일경의 후손이었다. 조정의 권력이 이동할 때마다 생사가 엇갈리게 되는 정치적 상황으로 두 집안은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 없었다. 김시구는 제주에 도착하자 마자 조정철을 죽일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조정철의 죄상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무명 50필을 주겠다고 공공연히 현상을 걸 정도였다. 관가에 일러바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김시구는 직접 변장을 하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염탐을 하기도 했다. 
 
김시구의 그물에 홍랑이 걸려들었다. 죄인의 적소에 드나든 것을 빌미로 조정철을 죽일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특별히 서까래 같이 두꺼운 태장을 만들어 홍랑을 매질로 고문하기 시작했다. 조정철이 임금이나 조정대신들을 저주하는 말을 한 적이 있는지, 외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은 일이 있는지, 홍랑과 관계를 맺었는지를 자백할 것을 요구하면서 가한 매질이 70대에 이르렀다. 조정철은 '정헌영해처감록'에 홍랑의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절단났다"고 썼다. 이미 김시구가 조정철을 죽이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음을 안 홍랑은 조정철에게 "공(公)이 사는 것은 이 한몸 죽는 것에 있습니다"고 말한 대로 끝내 목사의 요구에 불복하고 목을 매어 목숨을 끊는다. 조정철을 만난 지 2년여, 딸을 낳은 지 3개월 만이다.
 
조정철은 비통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외로운 신하 목숨을 건져 임금의 은혜에 피눈물 흘렸는데
모든 것이 거친 남쪽섬 한 사또의 계율에 달렸네
어제 미친 바람이 한 고을을 휩쓸더니
남아있던 연약한 꽃잎 산산히 흩날려 버렸네

 
김시구는 홍랑이 죽은 일을 덮기 위해 조정철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조정에 보고한다. 조정에서는 급히 제주목사와 판관, 정의현감, 대정현감을 모두 교체하면서 김시구도 잡아들여 조사를 벌였다. 새로 부임한 제주목사 이양중은 곧바로 조정철을 옥에 가두고 칼을 씌운 상태로 심문했다. 꼬박 100일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주리를 틀리고 집주인 신호의 가족까지 잡혀와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아무런 잘못이 드러나지 않자 임금의 명에 따라 조정철을 풀어주었다.
 
홍랑은 죽은 지 보름이 지나서야 '제주성 남문 밖'에 그보다 먼저 숨진 언니와 함께 묻혔다. 홍랑의 언니는 제주 정의현에 유배됐던 이형규의 첩으로, 이형규는 유배에서 풀린 뒤 강원, 경기 감사와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가 죽자 언니도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다. 한편 제주에는 홍랑이 죽은 뒤부터 석달동안 가뭄이 계속되다가 8월초에 큰 바람과 큰 비가 열흘이나 계속됐다. 처녀의 억울한 죽음이 재앙을 불러왔다는 소문이 도내에 퍼졌다. 
 
정조 시해음모사건에 연루돼 유배가 시작됐던 조정철은 순조가 즉위하고 5년 뒤 그 길고 긴 유배에서 풀려났다. 다시 관직에 등용된 조정철은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로 제주에 부임했다. 끔찍한 유배생활로 젊음을 다 보내야 했던 섬,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땅을 사또가 되어 다시 밟게 됐으니 참으로 오묘한 운명이다. 홍랑의 묘를 찾아간 조정철은 절절한 내용의 비를 세운다.

대역죄인의 몸으로 사랑하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비통함을 새긴 조정철의 비문.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이 쓰다'고 밝혀 홍랑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았다.

"홍의녀는 향리 처훈의 딸이다"로 시작되는 비문은 자신이 탐라에 유배된 일, '간사한 놈'이 자신을 얽어매기 위해 홍랑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사실, 자신을 위해 홍랑이 목숨을 바친 내용을 새겨넣었다. 그리고 홍랑에게 시 한편을 새겨 바친다.
 
구슬 향기 묻힌 지 몇 년이나 지났는가
누가 그대 원통함을 하늘에다 호소할까
아득한 황천길 돌아가 누구를 의지하나
깊이 감춰진 푸른 옥, 죽으면 또한 인연으로 맺어질까
 
영원한 세월에 아름다운 이름 족두리풀처럼 강렬하고
한 집안에서 난 높은 정절은 아우 언니가 뛰어났으니
정려(旌閭)를 지금 세우기 어렵지만
푸른 풀은 무덤에 자라날지니

 
시는 <장자> 외물편과 진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홍랑의 죽음을 충심으로 애도하고 그 정절을 한껏 기리고 있다. 고사를 인용해 시를 쓴 탓에 홍랑과 조정철에 대해 글을 쓴 이마다 이 시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쉽지 않은 모양이다. 조선후기 제주지역의 마애석각을 연구한 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의 번역을 실었다. 우리의 탐방을 이끈 백종진 부장은 마애석각 연구자 답게 비석의 기록에 충실했다. 홍랑의 죽음에 대해서도 김시구가 홍랑을 목매달아 죽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조정철이 비문에 새긴 내용에 따르면 홍랑이 "스스로 목 매어 죽은 것이 맞다"고 밝힌다.
 
제주목사 조정철은 홍랑이 남긴 딸도 만난다. 어머니를 잃은 생후 3개월의 핏덩이 딸을 중년의 여인이 되어 만났으니 그 아버지 조정철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조정철은 홍랑의 무덤이 황폐해지지 않도록 '푸른 풀이 자라나게 하리라'고 비문에서 약속한 대로 결혼한 딸과 그 집안을 보살폈다. 딸이 살고 있던 애월읍 곽지에 비자나무와 굴묵이나무로 집을 지어주고, 네 차례에 걸쳐 밭 7천평을 사주어 생활이 어렵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사위인 박수영을 비롯해 박씨 가문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5품 문관인 '통덕랑'(通德郎) 벼슬을 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고 홍순만 선생은 조정철과 홍랑의 후손들이 번창했다고 전한다. 홍랑의 딸 양주 조씨는 박수영과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는데 큰 사위 김석린은 진사가 되어 우도를 개척하고 주민들을 이주시킨 인물이다. 그 아들 김양수는 뛰어난 문인이었고, 손자 김근시는 제주부참사를 지낸 사업가였다. S-중앙병원 김덕용 원장은 조정철과 홍랑의 딸인 양주 조씨의 5대 외손이다. 둘째 사위 강이철은 무과에 급제해 정의현감을 지냈다.
 
조정철은 1년 남짓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주성 동성과 서성 외곽을 개축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는 한편, 성 주변에 12과원을 설치해 감귤재배를 권장했다. 또 도민들의 부역이나 세금이 과중하지 않도록 힘썼고, 흉년 때 육지에서 들어와 노비가 된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동래부사가 되어 제주를 떠난 이후에는 충청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형조판서, 대사헌, 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고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정철과 홍랑의 비운의 사랑이 알려지자 1998년 양주 조씨 종친회는 경북 상주에 있는 조씨 사당에 조정철의 부인으로 홍윤애를 배향하고 족보에도 부인 남양 홍씨, 신씨와 함께 홍윤애와 그 딸, 사위까지 등재했다. 조정철이 유배에서 풀린 뒤 부인으로 맞은 신씨는 홍랑이 죽은 1781년에 태어났으니 홍랑이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 끔찍하게 아껴 이례적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배 비장과 애랑
 
배 비장(裵裨將)은 제주도를 무대로 한 조선후기의 한글소설 <배비장전>의 주인공이다. 빼어난 기생 애랑의 유혹을 못 이겨 크게 망신을 당하는 비장(裨將)의 이야기다. 배 비장은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와 함께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온다. 어느 봄날 목사 일행은 야외로 봄놀이를 간다. 배 비장을 골탕먹이기 위해 목사와 방자가 짜고 일을 꾸민다. 애랑이 숲 속 시냇가에서 배 비장을 유혹하기 위해 교태를 부리고 결국 배 비장은 애랑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밤중에 애랑의 집으로 찾아갔다가 방자가 남편 행세를 하면서 들이닥치자 궤 속에 숨는다. 목사와 아전, 군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궤는 동헌으로 옮겨지고 배 비장은 알몸으로 궤를 나와 온갖 망신을 당한다.
 
'비장'은 임진왜란 당시 대장을 보필하는 장수를 말한다. 목사가 부임할 때는 측근 7~8명, 많은 경우 11명까지 데리고 왔는데 '군관'(軍官)이라는 직함을 갖는 인물들이 비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목사와 판관 등 제주의 고위관리들이 측근들과 함께 봄놀이를 가는 곳은 제주시 용담동 용연이나 제주시 오라동 방선문 계곡이었다. 백종진 부장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용연에는 1653년부터, 방선문에는 1727년부터 목사나 판관 일행의 방문기록이 시작된다. 애랑이 의도적으로 배 비장을 유혹한 곳으로 추정되는 방선문에는 관리들의 방문기록이 34건이나 남아있다.

제주목사, 판관, 방어사 등 고위관리들이 측근인 군관과 아들 등과 함께 방선문을 찾은 기록들.
 

방선문 암벽에 새겨넣은 고위관리들의 봄놀이 기록에 대해 후세인들은 흔히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한다. 기생들 끼고 술 마시면서 놀다가 남긴 낙서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마애석각 연구자의 시각은 다르다. 백 부장은 "육지 사대부들의 유희 문화가 제주에 전파된 것으로, 현장에 기록된 1차 역사자료"라고 말한다. 실제로 '군관'이라는 직함이 단순히 '지방군에 소속돼 목사의 경호를 담당하는 장수'가 아니라, 목사가 정사를 의논하는 측근들이었음이 마애석각에서 확인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주의 신분사회의 변화상이나 중앙과 지방 관리의 위상이 드러나기도 하는 소중한 자료라는 것이다.

두 여성의 묘비와 방선문의 방문기록인 석각을 통해 역사적 기록의 의미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의미있는 것은 목숨마저 아깝지 않았던 옛 제주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동이었다. 
오랜 세월 주인공들의 무덤을 지킨 비석은 가을비에 젖은 채 애절한 비문으로 그 사연을 전하고 있었다. 
군데 군데 피어나 비에 젖은 감국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 고운 사랑의 추억' 처럼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프로필>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전 한겨레신문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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