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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인들은 육지부와는 다른 그들만의 제사의례를 해왔다”
“탐라인들은 육지부와는 다른 그들만의 제사의례를 해왔다”
  • 김형훈 기자
  • 승인 2014.10.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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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30選] <27> 용담동 제사유적

통과의례라는 게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인 아르놀트 반 헤네프가 지난 1909년 만들어낸 용어이다. 통과의례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삶에서 치러지는 중요한 의식을 일컫는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들어 있다. 쉽게 말하면 태어나서 100일만에 치르는 백일을 비롯, 돌, 결혼, 장례 등이 모두 통과의례이다.

인간들은 이런 의례를 왜 할까. 한상복이 펴낸 <문화인류학개론>을 들여다보면 의례는 신의 호의를 얻고자 하거나, 속죄를 할 경우,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형성할 때 치른다고 한다.

특히 제사의식은 집단 구성원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제사는 인류가 ‘생각’이라는 틀을 갖추면서 있어왔다고 본다. 그걸 표출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사는 어느 장소에서든 진행됐고, 진행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서면 그런 제사유적은 성역화된 장소로 변신을 한다. 정치적 우두머리인 족장이 있다면, 제사장은 전문적인 직위로서 신성한 장소인 제사유적을 관리하게 된다. 삼한시대의 ‘소도’에서보듯 죄인들이 이곳으로 도망을 오면 잡아가지 못한다. 그만큼 신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용담동 제사유적. 언덕에 위치해 있어 멀리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사유적은 의례를 치르는 전용공간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 위치해 있지는 않다. 흔히 외곽에 위치해 있다. 제주에서도 그런 공간이 있다. 지난 1991년 발굴된 &lsqu용담동 제사유적’이다. 유적의 시기는 출토된 유물을 들여다보면 통일신라시대임을 알게 된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해안가의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안과의 거리는 300m 가량이며, 이 지점에서는 확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 이외의 다른 지역의 제사유적이 언덕에 위치한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도기)이다. 그것도 제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회색도기류다. 목이 긴 항아리와 병류가 이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목이 긴 ‘장경병’은 20여점이 출토됐다. 이렇게 장경병이 한꺼번에 출토된 곳은 우리나라에서도 흔치 않다.

용담동 유적을 제사유적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제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도기류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쓰이던 토기와 함께 출토되지 않고, 이 유적에서는 도요지와 건물터 등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례를 치르던 장소로 판단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항아리. 제주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통일신라로부터 수입해서 썼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그릇들은 파괴돼 있다. 그릇을 깨는 건 유물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며, 의례에 사용된 물건을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금기 의식’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용담동 제사유적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추론을 해본다면 탐라국 지배층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용담동은 고·양·부 삼성이 웅거를 튼 제주시 중심부의 외곽으로, 이들 지배세력들이 여기에서 진행된 의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많다.

제사행위는 어떤 형식으로 이뤄졌을까. 수입된 도기류를 제사의례에 사용했다는 점은 통일신라의 정신체제도 일부 수용했을 가능성을 읽게 만든다. 탐라가 신라와 국교관계를 맺은 건 통일 직후이다. 서기 676년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권력을 장악했고, 탐라국은 684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예기(禮記)>엔 ‘죽은 자에게 산 자의 그릇을 쓰는 것은 마치 순장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제사를 할 때는 실제 사용하던 그릇을 쓰지 않았다. 신라는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했을테고, 탐라 역시 신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타나는 도기류는 생활에서 쓰지 않은 것들로, 이런 도기류를 제사행위에 사용했다는 건 신라에서 행하는 의례를 어느 정도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용담동에서 지내던 제사의례가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담은 것 같지는 않다. 탐라는 비록 신라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지만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제주에서 행해지는 제사의 특수성을 읽을 수 있다. ‘숙종실록’은 이형상 목사가 파괴한 ‘풍운뇌우단’을 중앙조정에서 다시 복원하도록 했다는 글이 있다. 이형상 목사는 극단적인 성리학 중심사고를 지닌 학자로 ‘당 오백, 절 오백’으로 불리던 제주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문화파괴를 자행한 인물이다. ‘숙종실록’을 한 번 들여다본다.

“제주에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을 세우라고 명했다. 이보다 앞서 제주에는 고을을 창설한 초기부터 풍운뇌우단이 있어 제사를 올렸다. 목사 이형상이 그걸 없앴는데, 해마다 섬에는 가물고 병마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제주도 사람들은 그 단을 없애서 탈이 났다면서 목사 정동후에게 다시 설치해 줄 것을 호소했다. 목사 정동후는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렸고, 예조에서 다시 세울 걸 허락했다. 그 해부터 서울에서 향축을 내려 보내 제사하게 했다.”<숙종실록 64권, 숙종 45년(1719)>

숙종실록에 보이는 ‘풍우뇌우단’은 고을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다. 고을이라면 탐라국이 만들어질 당시의 제주를 일컫는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는 탐라시대부터 그들만의 제사의례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하늘에 비는 것일 수도 있고, 바다를 향해 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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