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00:04 (금)
한 때가 있다
한 때가 있다
  • 홍기확
  • 승인 2014.06.11 13: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53>

지금 초등학생들의 사교장소가 PC방이라면, 내가 어렸을 적에는 목욕탕 의자 수 십 개가 놓인 오락실이었다. 이곳은 모든 제작 가능한 불량식품이 유통되고, 새로 출시된 장난감들의 홍보처가 되었다. 또한 오락을 할 수 있는 부귀한 자와 구경만 해야 하는 빈천한 자가 모여 서로의 빈부격차를 재확인하는 종합적인 장소였다.

오락실 얘기가 나오면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민낯으로 말하면 어렸을 적의 도둑질이다.
일을 한 대가를 현금으로 받는 아버지의 직업 상, 학교에 돌아오면 아버지의 두툼한 지갑과 동전들은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500원짜리 동전이면 오락을 10판 할 수 있고, 천 원짜리는 오락 10판에 떡볶이가 추가된다.
가끔 착한 일을 하면 어머니가 동전을 쥐어주시긴 했지만 그것으론 오락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의 동전을 공략하기로 했다. 백원, 오백원. 하루 이틀. 그러다 간이 점점 커진 나는 지폐에도 과감하게 손을 대게 되었다. 가슴은 벌렁거려도 욕구는 채워야지 않는가?

두둑한 주머니로 인해 나는 잠시나마 오락실에서 황제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오락을 한 판 시켜주면 그 날은 내가 영웅이 된다. 빈천한 오락감상을 접고 실제 오락기에 앉게 되면, 하늘을 날 듯 몽롱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걸렸다. 학교가 끝나고 놀러 나간 뒤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자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주머니에는 훔친 돈을 바꾼 터라 50원짜리 동전이 가득했다. 어린 기억이지만 어머니가 돈을 훔친 것을 혼내면서, 오락실에서 시간모르고 오락을 한 것에 대해서도 크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어찌할 바 몰랐던 공포와 미안함에 따른 두근거림은 지금도 공감하고 느낄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 사건에 대해 별 말씀이 없으셨다. 평소에도 말이 없으니 이상할 건 없지만, 오히려 폭풍전야의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지갑 안에 넣어두시던 천 원짜리 지폐들을 밖으로 꺼내 놓으시고, 널브러진 동전들도 전보다는 배가 늘어 있었다. 일부러 그러신 것이다.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고 돈을 훔쳐가라는 배려였다. 5개 중에서 1개는 티가 나지만, 10개중에서 1개는 그다지 티가 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도 가슴의 두근거림이 전보다는 적었던 게 생각난다. 그 후로 얼마나 더 오래 아버지의 돈을 훔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지는 않았다.
이게 아버지의 교육법이었다. 모든 것에는 ‘한 때’가 있다. 아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버지다. 배려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가르침은 지금도 향기로 남아 있다.

어머니에게 혼나고 며칠 뒤 어머니가 슈퍼에서 물건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뉴수가라는 조미료였는데 당시 100~2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천원을 나에게 쥐어주셨다.
그날따라 이상했다. 뉴수가가 가까운 슈퍼 두 곳에 모두 없었다. 명절전이라 다 팔렸단다. 나는 모험을 떠났다. 우리 동네가 아닌 멀리 다른 동네에 있는 슈퍼로 간 것이다. 다행히 그곳에는 있었다. 안도감을 느끼며 뉴수가 한 개를 잡아 돈을 내려고 하는데, 아뿔싸! 천원짜리 지폐가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딘가에 흘린 모양이다.

터덜터덜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짧은 다리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이미 시간은 집에서 출발한 후 한 시간이 넘어있었다. 어머니는 야단을 쳤다. 또 오락실에서 돈 다 쓰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눈물이 쏙 나고 억울했다. 정말 아닌데.
그 때 아버지가 조용히 오시더니 내손에 천원을 다시 쥐어주셨다. 아무 말도 없었다. 억울한 나는 기어코 뉴수가를 사왔다. 당시 기억으론 열 받아서 오기로 두 개를 사왔던 것 같다.
믿음이란 꼭 말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한 때’다. 그 한 때가 수 십 년 전이라도 괜찮다. 신뢰는 깨지기 전까지는 결단코 유지되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게임, 장기, 바둑 등 잡기에 미쳐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공부에 관해서는 잔소리를 안 하셨다. ‘한 때’가 길구나하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 스스로 한 것이다. 밥 먹고 자는 것 빼곤 공부만 했다. 다만 공부만은 ‘한 때’가 아닌 평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한 때가 모두 한 때로 끝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이가 TV 애니메이션에 탐닉한 때가 있었다. 아내는 걱정했지만 나는 한 때라고 실컷 보여주자고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흥미가 떨어졌는지 다른 놀 거리를 찾는다.
게임에 몰두한 때도 있었다. 아내는 역시 걱정이었다. 나는 한 때라고 지켜보자고 했다. 지금은 1주일에 1시간도 안한다.
요즘은 책읽기와 공부에 미쳐있다. 흐뭇하긴 하지만 이것도 한 때임을 알고 있다. 격려할 뿐 지켜본다.

한 때가 있다.
아버지가 하셨던 얘기가 있다. 어렸을 적 할머니가 잠깐 슈퍼를 하셨단다. 장남인 아버지와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슈퍼의 물건을 훔쳐 동네 다리 밑에서 몰래 먹었단다. 할머니의 슈퍼는 망했다. 아버지는 가끔 술을 드시면 자랑스레 본인이 물건을 훔쳐 먹어서 슈퍼가 망했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아버지를 지켜보셨던 할머니도 말이 없었다. 분명 당시 슈퍼의 물건들이 없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둑이 아버지인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물건을 훔쳐 먹는 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3남 2녀 전체였을 것이다. 자식별로 빈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말이다.

절약은 몸에 배었고 깔끔하고 정확한 성격이, 아버지와 비슷한 할머니였다.
돌아가신 후 방을 치울 때에는 헌 옷을 주워다 한 땀 한 땀 기워 새롭게 탈바꿈한 옷들이 장롱에 가득 차 있었다. 손자손녀부터 시작해서 아들딸까지, 주고 싶었지만 주지 못한 옷들. 가족들은 할머니의 짐과 옷장을 정리하며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침마다 동네 전체를 쓸던 할머니였다. 어머니도 깔끔한 할머니 눈치를 보느라 아침저녁으로 집안 전체를 두 번 청소하셨다. 이런 할머니가 슈퍼의 물건이 주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아버지가 경험한 한 때. 내가 어렸을 적 한 때.
이제 나는 내 아이의 한 때를 지켜보고 있다.
앞으로 수많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픈, 내 아이의 한 때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로써 많은 고민을 할 것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혼란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다만 아이가 경험하는 ‘한 때들’에서, 아이에게 아빠로써 내가 어떠한 기억으로 남을지 노력하려고 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