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7:38 (금)
삶과 행복 가르기
삶과 행복 가르기
  • 홍기확
  • 승인 2014.03.25 14: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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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47>

강요된 행복을 생각한다. 우리는 꼭 행복해야만 하는가?

로또를 산 적이 없다. 하지만 로또에 당첨되면 행복할 것이다. 왜? 돈을 얻었으니까. 그것도 노동력의 제공없이! 하지만 돈을 다 쓰면 불행할 것이다. 왜? 돈을 잃었으니까.
단순화하면 행복은 순간이나 기간, 조건과 같은 것의 있고 없음에 따른 일시적인 감정이다. 가령 방금 결혼해서 월세 단칸방을 얻는다. 그리곤 밥을 먹기 위해 상을 편다. 둘이 마주 앉자 좁은 방에서 서로의 등은 벽에 닿는다. 라면을 끓여먹는다.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행복할 때도 있다. 왕후(王后)의 밥, 걸인(乞人)의 반찬처럼 부부가 벽을 등대고 앉아 간장에 밥을 비벼먹어도 가끔은 함께 있음에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대근 주연의 영화제목 『밥만 먹고 못 살아』처럼 ‘살아’가는 데 있어 밥만 먹는다는 것은 가끔의 행복만을 제공한다. 즉, 행복은 일시적인 감정이지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꾸준히 행복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항상 행복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종교인들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고도 합당한 일이다. 현실에서는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지금 같은 ‘매일 매일 행복하라.’는 등의 행복에 대한 과열에 우리들은 피로를 겪고 있다. 물론 강요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학습된 행복을 생각한다. 전 세계가 행복공화국으로 똘똘 뭉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보면 행복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 같다.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관계의 힘’, ‘비울수록 가득하네(부제 : 행복을 키우는 마음연습)’, ‘행복해지는 마법의 사칙연산’, ‘행복의 조건’, ‘서른엔 행복해지기로 했다’, ‘행복 교과서(부제 : 청소년들의 행복 수업을 위한 첫걸음)’ 등등.
왠지 남들은 남녀노소 다 행복한데 한번 뒤처지면 행복을 잃을 것만 같다. 결국 행복도 배워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읽고 방법을 습득하면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처럼 멈춰서거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는 것처럼 마음에 맺힌 아픔과 번뇌를 내려놓으면 된다. 그래도 잘 안 되면 연습 3부작, ‘화내지 않는 연습’, ‘생각버리기 연습’, ‘나쁜 마음 버리기 연습’을 시작해보자.

행복은 강요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 파랑새를 생각해보자.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1906년에 쓴 아동극 『파랑새』는 유명한 틸틸(일본어 번역본으로는 치르치르)과 미틸(역시 미치르)의 모험담이다.
줄거리는 꽤나 단순하다. 어느 날 요정이 찾아와 틸틸과 미틸에게 ‘행복한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한다. 요정은 덤으로 진실을 볼 수 있는 모자와 영혼들을 선물한다.
시간의 안개를 헤치고 추억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 파랑새를 찾는다. 하지만 이내 파랑새는 죽는다.
다음으로는 전쟁, 병균이 가득한 밤의 궁전을 간다. 마지막 방에서 결국 파랑새를 발견하긴 하지만 이내 다시금 죽고 만다.
틸틸과 미틸은 계속해서 숲 속, 묘지, 행복의 궁전, 미래의 나라를 찾아가는 모험을 펼치지만 이곳에서는 심지어 파랑새조차 없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파랑새는 집에 있었다. 이 파랑새는 그간 집에서 길렀던 회색빛 산비둘기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론을 이것으로 알고 있다. 틸틸과 미틸이 수많은 역경을 딛고 찾은 행복, 파랑새는 결국 집에 있다는 것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교훈의 개념으로 ‘집이 최고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라는 것을 집어넣고 있다. 하지만 아동극을 각색한 동화에는 빠진 내용이 있다. 원작인 아동극에는 있는 반전이다.

틸틸과 미틸이 집에 돌아오자 파랑새가 집에 있었다. 원래 이 파랑새는 그간 집에서 길렀던 회색빛 산비둘기였었다. 행복을 찾았다는 기쁨과 반가운 마음에 파랑새를 잡으려고 새장을 연다. 그러자 파랑새는 푸드덕 날개짓을 하며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결국 행복이란 것은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는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적인 의미만 포함한다. 마지막 내용이 없었던 것은 어린이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고, 어른 입장에서는 임팩트를 없애는 개악(改惡)이다.

나는 행복을 논하지 않는다. 논할 가치도 없을뿐더러 논할 수도 없다. 측정할 기준도 없을뿐더러 측정할 수도 없다.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복합적, 추상적인 감정인 행복을 찾고 정의한다는 것은 학자들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삶만을 논한다. 나만의 인생만을 이야기한다. 그 중에서도 지극히 나에 맞춰진 목표로 ‘평범한 삶’, ‘품격있는 삶’을 걸어간다.

행복이 강요되고, 행복도 학습해야 하는 시대다. 그런데 과연 정답일까?
분명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삶이라는 대전제에서 행복은 소전제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감정 자체는 언론이나 책 몇 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정의할 부분이다. 내 삶을 잘 살고 있다는 대전제가 해결되면 행복이라는 소전제는 자연스레 녹아든다. 수학으로 치면 삶이라는 합집합 안에 있는 ‘행복’이라는 부분집합은 증명이 구지 필요 없다.

강요되고 학습된 행복이라는 열풍에 딴지를 걸고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만 삶은 울퉁불퉁하고, 삶은 꾸준함이지만 행복은 순간이다. 행복이라는 순간의 기쁨, 쾌락을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것이라는 생각.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회피하고, 쉬워 보이는 ‘행복 찾기’라는 기술(skill)을 개발하는 것은 잘못 됐다는 생각. 여러 가지 삶의 얼굴들을 고루 맛보고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

거친 삶. 행복한 삶. 우아한 삶. 품격 있는 삶. 평범한 삶. ‘삶’이란 단어를 빼고는 모두 수식어에 불과하다. 나는 품격 있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가치관의 방향을 정했다. 삶이 먼저다. 삶의 정의가 먼저다. 그 다음 삶에 수식어들을 더한다. 더하기 나름이다. 빼기 나름이다. 본인이 정의하기 나름이다.

고대 중국의 태평성대는 요순우탕의 재임시기였다고 한다. 이 중 은(殷)나라 시조인 탕왕(湯王)이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세숫대야에 새겨놓은 글이 있다.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진실로 새로워지고 나날이 새로워 지고 또 날로 새로워 진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본다.
진실로 생각하고, 나날이 생각하고, 또 날로 생각하자.
나, 꼭, 과연, 행복해야만 하는가?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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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조 2014-03-25 17:42:00
가슴에 와닿는 글이네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숨가쁘게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뒤돌아 봅니다.
시계 붕알처럼 왔다갔다 되풀이 되는 나날들. 엔젠가는 멈추겠지요.
삶의 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홍기확 2014-03-25 15:56:00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 말이 화제가 됐던 적이 있더랬죠. 행복=물질적 풍요라는
공식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아니었나 합니다.
행복은 조건과 상대적인 비교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닐까요?
반면 삶이란 건 행복과 별개인 듯 합니다. "잘 살았다. 후회는 없다."라고
할 때, 죽음의 순간에서 행복이란 개념이 꼽사리낄만큼 대단한 존재가 될까요?
마지막 순간에 행복했는지 안 했는지를 '전반적으로' 돌아보기에는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할 것 같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두었을 때 씨익 하고 웃으며,
세상에서 소풍 잘 놀다 끝내고 어디론가 가렵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파랑새는 없다 2014-03-25 15:03:00
멋진 글이네요.
행복한 삶을 위해 달려왔던 내 자신이 ‘아! 뭐지?’ 하며 순간 멈칫했습니다.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집착을 버리고... 번뇌를 버리고...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자!
언젠가 문득 죽음이 내 눈앞에 왔을 때, “잘 살았다...후회는 없다” 말할 수 있도록...
그래서 나와 가족들의 행복과 건강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살아왔죠.
이 글을 읽고 나니, 순간순간 주관적 감정에 의해 생기는 ‘행복’이란 감정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드네요.
보편적인 생각을 뒤집게 하는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