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의 발견
창의성의 발견
  • 홍기확
  • 승인 2014.03.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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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46>

창조성, 창의성도 배워야 하는 시대다.
과거 상상(想像), 공상(空想)과 같은 단어는 좋지 않은 의미었다. 그래서 이런 단어들은 산업사회에서 보통 기획, 계획이라는 용어로 교체되었고,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은근슬쩍 창조, 창의로 대체되었다. 현 정부의 기조인 ‘창조경제’나 이시형 박사가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창재(創才)’도 창의적인 인재의 약어이다.
한편 요즘 출간되는 책들의 화두도 마찬가지이다. 창의적이라는 뜻의 ‘크리에이티브(creative)’가 책제목이나 부제목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런 상업으로 포장된 창의적인 세계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개미』, 『뇌』로 유명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그가 14살 때부터 상상한 것들을 묶은 사전인 『상상력 사전』을 펴내며 반기를 들었다.

창조성, 창의성이 창조력, 창의력처럼 일종의 ‘힘’이라면 분명 키울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단순히 엉뚱함이면 충분했다. 상상을 하면 됐다. 생각의 나래를 펼치며 뇌 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몇몇 정해진 공식으로 창의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
니체는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인슈타인 역시 ‘논리는 우리를 a에서 b로 데려다 줄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다 줄 것이다.’라며 기존의 논리를 거부했다.
결국 창의성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기존의 사실과, 정립된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여기에 더해 어떠한 상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자꾸 아이가 우주에서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끝과 죽음을 얘기한다. 얼마 전 목욕탕에 가고 올 때 아이와 나눈 대화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 친구의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물론 누군가는 걱정할 테지만.

“아빠, 아빠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나름 어른이다. 하지만 변변치 않은 어른도 있기 때문에, 구지 말하자면 성장하고 있는 중인 어른이다. 하지만 아이는 지금 미래를 상상하며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아이의 관점에서 답변해준다.

“아빠는 남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우리는 제주도에 사니까 제주도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적응하도록 도와주려고 해.”

“그럼 불이 나면?”

“우리가 모든 걸 도와줄 수는 없어. 불이 났을 때는 아빠보다 불을 잘 끄는 소방관 아저씨한테 전화를 하는 게 더 현명한 거지.”

“도둑이 들었을 때는?”

허! 좋은 질문이다. 살짝 흥분이 된다. 아이의 꿈은 경찰이다. 내심 경찰은 부모 입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직업이었다. 마음 약한 녀석이 나쁜 사람을 잡는다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평생 입는 꼴이다. 그래서 대답한다.

“역시 불 끄는 거랑 마찬가지야. 달리기를 해도 아빠보다 빠른 경찰관 아저씨가 도둑을 잡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지.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지만, 남이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지. 우리가 못하는 것도 많아. 그럴 때 분명 어딘가에 우리가 못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야.
누구나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어. 이훤이는 이훤이가 잘 하는 걸 하면서 남을 도우면 되는 거야.”

살짝 아이의 눈치를 본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역력하다. 일단은 성공이다. 하지만 아이는 불리함을 인지했는지 화제를 돌린다.

“난 우주에서 내려왔고, 아빠는 다른 곳에서 왔잖아. 우리 다음번에도 아빠랑 아들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윤회(輪廻)를 묻다니! 하지만 엉뚱한 질문에도 나는 성실하고 행복하게 답한다.

“물론 다시 만날 수 있지. 이번에도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다시 만났잖아? 아빠가 늙어가면서 당연히 이훤이보다 먼저 지구를 떠나겠지만 나중에도 다시 만나자. 그때는 이훤이가 할아버지가 되고, 아빠는 귀여운 손자쯤으로 말이야. 아빠는 이훤이보다 먼저 우주에 가서 언제 내려오는 게 좋을지 지켜보고 있을게.”

아이의 질문 공세는 이어진다.

“늙어간다는 건 나쁜 거야? 죽는다는 것은 안 좋은 거야?”

나 참. 8살 아이가 세월과 죽음을 얘기하다니. 참 기특하다.

“누구나 늙게 되어 있어. 아빠도 늙게 되어 있고, 점차 힘이 약해져 가겠지만 그 때는 또 그 때만의 재미가 있는 거야. 지금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한 건데, 그건 나이가 많아서 늙더라도 변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 누구나 공평하게 한 번만 죽으니 손해 본다는 생각할 필요 없어.”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한다.

“아빠가 늙어서 힘이 없으면 내가 어른이 돼서 힘이 세질 테니까 그땐 아빠를 업어줄게. 그리고 아빠가 위험할 때는 내가 구해 줄께”

그간 상당한 피로가 풀렸다. 어찌 이리도 뜬금없는 상상을 하며 말을 오목조목하게 잘할까. 일단은 대답한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이훤이가 아기였을 때는 아빠가 많이 업어줬으니까 말이야.”

이제 아이가 마지막 질문을 툭하니 던진다. 먼 길을 떠난 여정을 마치고 순간이동을 해서 제자리에 온 것처럼 얼떨떨하게 만든다.

“나, 잘 자라고 있지?”

득의만만한 표정이다. 이런. 너무나 잘 자라고 있는 걸? 나는 대답한다.

“그럼 물론이지. 넌 정말 멋진 친구야. 아빠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아이와 두서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겁다. 아이들은 엉뚱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라나면서 점차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회성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상상력을 잃어간다. 사회성 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상상력은 오염되기 시작한다.
분명 창의성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 잊고 있을 뿐이다. 항상 중요시하는 거지만 없는 것을 개발하는 것보다는, 잠재되어 있는 것을 계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창의력(創意力)을 발명하는 것보다는, 창의성(創意性)을 발견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웅변. 논쟁. 설득. 세상이 힘주어 말하는 이런 직선적인 대화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소한 얘기. 각자의 상상을 나누기. 이런 것들도 분명 대화다.
아이와의 대화에서 훼손되지 않은 상상을 상상한다. 그 안에서 창의성을 발견한다. 수 십 년 후에 어른이 노인이 되고, 소년이 어른이 되어도 청렴한 상상을 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청렴결백한 부자(父子)가 되기를 바라고 노력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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