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거울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거울 이야기
  • 홍기확
  • 승인 2014.02.21 15: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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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44>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인 『거울을 통하여』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이 나온다.

붉은 여왕과 앨리스가 달리기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주변의 나무와 돌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였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던 중 가쁜 숨을 잠시 고르며 앨리스가 여왕에게 묻는다.

“왜 주변의 것들은 움직이지 않나요?”

붉은 여왕은 숨을 헐떡이며 대답한다.

“그럼 당연하지, 어디 가겠어?”

앨리스는 다시 말한다.

“제가 온 나라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주변의 것들이 변해요”

그러자 여왕은 대답한다.

“느린 나라네. 여기서는 가만히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라도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해. 이 정도는 뛰어야 뒤처지지 않아. 어딘가를 닿거나 앞서가려면, 이것보다 곱절은 더 빠르게 뛰어야 해.”

1973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괴짜 진화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주장한, ‘붉은 여왕의 법칙(Red Queen effect)’이 있다. 그는 앞선 이야기에서 이 법칙을 이끌어냈다. 모든 생명체가 빠르게 진화하지만 주변 환경도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므로 진보와 진화가 둔화된다는 게 주요 골자이다.
그리고 말한다. 달려라! 계속 달려라! 지구의 탄생 이후로 생명체의 90%는 멸종해 왔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생명체만 남는다.

한편 붉은 여왕의 법칙은 여러 곳에서 응용된다.
군사학에서는 군비경쟁을 얘기할 때 위 법칙으로 인해 칼은 점점 예리해지고 많아지며, 핵무기와 같은 무기의 폭발력은 끊임없이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군비경쟁이다. 대규모 전쟁은 최근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움직이는 화약고’는 산재해 있고 그 규모와 범위도 커져만 간다.
경영학에서도 제품의 혁신을 설명할 때나 그 과정에서의 기업의 흥망(興亡)을 설명할 때 이용된다. 가정용 컴퓨터에서 휴대용 컴퓨터인 노트북 컴퓨터로, 나중에는 아예 전화기에 컴퓨터 기능을 심은 스마트폰이 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패배자인 가정용 컴퓨터 제조업체 IBM은 중국의 레노보에 PC산업을 매각했고, 스마트 폰 경쟁에서 패배한 노키아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으며, 모토로라는 심지어 경영난으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균형을 잡아보자. 리 밴 베일런은 ‘붉은 여왕의 역설’ 또한 동시에 주장했다. 이는 다윈의 진화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자기 밥그릇을 차다니. 그래서 괴짜 진화생물학자다.
그는 법칙의 역설로 나비와 난초를 예로 든다. 나비는 주식으로 꿀을 빨며 이때 머리에 꽃가루를 묻히게 된다. 그리곤 꽃가루를 운반하여 다른 꽃들에 수정시킨다. 흔히 아는 아름다운 동행이자 공생관계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나비들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꿀을 빠는 대롱도 함께 길어졌고, 이제 나비는 꽃가루를 건드리지 않고도 꿀을 빨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가장 깊은 ‘꿀샘’을 가진 난초들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꿀샘이 깊어야지만 나비들이 꽃가루를 묻히게 되고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난초는 변화에 적응하여 꿀샘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길게 늘였다. 결국 ‘작은 나비’들은 사라지고, ‘큰 나비’들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대가 진행됨에 따라 꿀샘이 제일 깊은 난초와, 꿀을 빨기 위한 대롱이 가장 긴 나비들이 선택되었다. 그 결과 꿀샘의 깊이가 25센티미터나 되는 난초까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붉은 여왕의 법칙의 핵심. 계속 달려라. 그러면 살아남는다.
붉은 여왕의 법칙의 역설. 계속 달려라. 하지만 이거 아니? 큰 도토리던 작은 도토리던 도토리의 키를 재기 위한 달리기를 하며 아등바등대도 어차피 그 중에 가장 빠른 놈들만 살아남는다.

결국 보통 사람들은 제자리에 멈춰있기 위해 달리고, 나름대로 평범하게 달리는 사람들은 점차 뒤처지며 도태된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두 배로 빨리 달리는 사람들이다. 이들 세 부류의 공통점은 ‘달린다’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우열(優劣)’과 ‘승패(勝敗)’일 뿐이다.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정착한지 3년 반 정도가 지났다.
결정적 계기는 지하철이 싫어서였다.

출근시간. 걸음이 느린 나는 천천히 지하철역을 향해 터벅터벅 걷는다. 지하철 역 주변에는 사방팔방에서 밥벌이 장소로 향하는 전사(戰士)들이 모여든다. 지하철 각 출구마다 사람들은 빼곡히 들어서고 삶의 군상들은 각자의 모션을 취한다. 이어폰을 끼고 외국어를 중얼거리며 걷는 사람, 머리를 미쳐 못 말렸는지 엉킨 머리를 푸는 사람, 잠이 덜 깼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는 사람 등.
그런데 이 어울리지 않는 군중을 각성시키는 사람이 등장한다. 뭐가 그리 바쁜지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한 명이 뛰자 열 명, 백 명이 뛴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뛴다. 주자(走者)들의 절반은 ‘아, 저 사람은 분명 지하철이 오는 정확한 시간을 알기 때문에 뛸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분명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뛰니까 뛰었을 것이다.
나는 뛰어본 적이 없다. 뛰는 게 싫었다. 지하철을 놓치면 다음 것을 타면 된다. 불과 2~3분 차이이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뛰지 않는 사람들은 어르신들과, 나와, 몇몇 사람에 불과했다. 아이들조차 엄마의 손에 이끌려 뛰었다.
이게 도시다. 반박할 수 없는 붉은 여왕의 세계다. 이야기의 출처인 소설의 제목 『거울을 통하여』처럼 우리가 거울을 들고 스스로를 바라보면 분명 볼 수 있는데, 자기를 쳐다볼 시간이 없다. 그저 달리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카의 책제목,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좀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뛸 때도 있다. 하지만 땀이 날 때는 잠시 바람이 귓결을 스치게 놔두고, 땀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도 부린다. 쉰다면 무슨 큰 일이 날 것 같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
TV도 10년 넘게 보지 않고 있다. 시사․드라마․유행어. 뭐, 이런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5가지 종류의 신문으로 얼렁뚱땅 글자를 통해 배운다. 다른 사람들과 드라마나 유행어에 관해 얘기할 때에는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준다. 그러다 은근슬쩍 화제를 전환한다. 나는 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 기존의 화제를 전환하고, 새로운 화제로 이끄는 법을 배웠다. 드라마나 정치 얘기 말고도 세상에는 사람들과 나눌 얘기가 퍽이나 많은 점도 화제를 전환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어쨌든 저쨌든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것을 안 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도둑질 같은 걸 하지 않는다면 지구에서 사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 달린다 해도 내가 가끔씩 쉰다고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없다. 100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가, 200보 전진을 하다가 그 자리에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다.

가끔 내 정체성을 잃고 ‘내가 뭐하는 거지?’,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때는 붉은 여왕의 법칙과 역설을 생각하며 거울을 꺼내고, 거울을 닦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으로 거울을 쳐다본다. 그리고 한 두 가지쯤의 일들을 내려놓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험해본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설은 잠정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지구의 역사는 46억년, 인류의 역사는 300만년, 나의 역사는 100년쯤 될 것이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치면 인류의 역사는 56초, 나의 역사는 0.0002초 정도 된다. 진화생물학은 지구의 나이, 인류의 나이로 진화(進化, evolution)와 약육강식(弱肉强食, the law of the jungle)과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을 연구한다.
그들의 연구대상에서 나를 가끔씩 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부탁이다. 쉼 없이 달리기에는 벅차다. 산업사회에서 게으름은 악이다. 부지런함은 선이다. 하지만 그 중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휴식.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일 내가 죽는다면 과연 오늘 어떤 일을 할 것이지 등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물론 그는 살아서도 그랬지만, 죽어서도 영웅, 귀감, 표본, 위인으로 남았다. 단,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잡스다운 삶을 살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다운 삶을 살았고, 살고 있다. 나는 나답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편이다.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다. 사지선다, 오지선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관식이다. 한 개의 질문에 지금까지 살고 죽은 인류의 숫자만큼의 ‘해답’, 풀이가 존재한다. 그 말은 ‘정답’, 공식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가 코앞에 있는데 최근 가까이에서 바다를 바라본 적이 손을 꼽거나 없다면, 그저 달리고 있는 것이다.
산이 눈앞에 있는데 최근 오르지 않았다면, 역시나 달리고만 있는 것이다.
가족들이 옆에 있는데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면, 혼자 달리고 있거나 가족들과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거울을 꺼내 볼 일이다.
거울과 이야기를 나눠 볼 일이다.

미국의 시인 매들린 브리지스의 시 『인생 거울』의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세상에는 변치 않는 마음과 굴하지 않는 정신이 있습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중략)

"왕이든 걸인이든 삶은 다만 하나의 거울
우리의 존재와 행동을 비춰 줄 뿐."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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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확 2014-03-12 08:52:33
글의 내용 중,
"모토로라는 심지어 경영난으로 인해 마이크로소프트에 인수되었다."
에서,
모토로라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닌 구글에 인수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쓴 글들을 읽다보니 오류가 있어서 고쳐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