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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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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기확
  • 승인 2013.08.30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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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33>

요즘은 보통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아내가 출퇴근을 자가용으로 하면서 자연스레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 우선 똥배가 들어갔고, 마라톤에 필수적인 하체근육이 살짝 생긴 것 같아 9월에 있을 마라톤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어제는 자전거로 퇴근하다 내리막길에서 충격을 먹었다. 잠시 온 소나기에 나무와 풀들이 생기를 발하는지 풀냄새가 코로 단박에 확 하고 들어왔다. 느낌은 이렇다. “풀냄새가 정말 좋구나!”
10년 넘게 시를 쓰지 않고 있다. 3년 전 추진한 일 년짜리 장기계획이었던 감수성 회복 프로젝트, 『이성에서 감성으로』가 실패한 이후로 좀체 감수성이 살아나지 않는다. 글로 쓸 수는 있지만, 이 느낌이 모두 내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겨서이다. 내리막길의 바람과 함께 흡입한 풀냄새에 시상(詩想)이 떠오르긴 했다. 그 짧은 5초 동안 내 머리는 획획 돌아서 하나의 시를 만들었다. 하루가 지난 지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한 번 떠들어 본다.


『느리게 걷는 사람』 2013. 8. 22

이래야 내리막이다
모두 다 할 만큼 하는 세상이다
떨어질 때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

내리막의 바람, 풀내음에서
어머니의 청량(淸凉)한 젖냄새를 맡는다
자연은 이렇게 커버린 어른에게 의외로
다가온다
콧구멍은 후비라고만 있는 게 아니란다

다시 오르막
내 모든 근육, 세포, 땀방울까지 공모한다
내가 졌다
내린다
내려놓는다
걷는다
함께 걷는다

걸으니 비로소 풀내음은 정체를 드러내고
잠시 멈추어 원인제공자에 대한 묵념

어머니 내 어릴 적에 말하셨지
그렇게 빨리 뛰다가 넘어지면 다친단다
풀내음을 빌려 하는 이야기


어제 이런 느낌이 오롯이 내 것은 맞다. 하지만 단지 어제일 뿐이다. 나는 새로운 하루를 산다.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얕아지고 감상은 약해져서 단지 시(詩)로만 남는다. 결국 나의 시는 본의 아닌 거짓이 되고 만다.
신문에 많은 시들이 등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시를 쓰는가 하고 읽어본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시평론가의 글을 읽으면 이해될까 하면, 더욱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만약 내가 본격적으로 시를 다시 쓰게 된다면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시를 쓰겠다. 책으로만 남아 독자와 호흡하지 못하는 자기애(自己愛)적인 글들은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다.
느낌은 느낌으로만 끝나는 것도 좋다. 그냥 느낀다. “풀냄새가 정말 좋구나!”, 단순히 이렇게 말이다. 격식 있고 품위 있는 감상은 시인의 몫으로 남겨놓고 오롯이 느끼기만 해도 된다. 이 느낌이 흩어지더라도 모든 걸 다 기억속에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본질은 순간의 느낌이지 그 후의 감상이나 기록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나 역시 본질을 잃을 때가 많다.
육아와 관련된 책을 꾸준히 읽는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아이에 대한 내 태도는 나아지다가 나빠지다가 한다. 육아책들을 읽다보면 항상 부모에게 과도한 책임과 “육아테크닉”을 강요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육아책들은 육아에 필요한 자기계발서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숙제들을 부모에게 안겨준다. 책대로 잘 해 보려고 하지만 며칠 가지 않는다. 습관으로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도 든다. 긍정심리학의 대가 탈 벤 샤하르는 『하버드대 52주 행복연습』에서 말한다.

“일단 당신이 갖고 싶은 습관을 정했다면, 수첩에 적어놓고 실행해 보자. 새로운 습관을 시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달 정도 꾸준히 노력해 본다면, 어느새 양치질하듯 쉽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양치질하는 습관이 있으며 이 습관을 위해 특별한 자기통제 능력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한 달 정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데 한 달 동안 안정적으로 육아를 한다는 건 나의 경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하루에 이를 두 번 닦는 것도 귀찮으면 건너뛰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한 감수성은 부족하나 감정변화는 충분하고, 꾸준히 노력은 하지만 한 달의 지속은 무리다.
시의 본질은 순간의 느낌이다. 육아의 본질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다. 시의 부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기록, 글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육아의 부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아이와의 대화법, 부모의 감정 조절법과 같은 테크닉이다.
긴 시간 본질, 아이에 대한 사랑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요즘 아이와의 하루하루를 단지 방어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놓치니 육아테크닉이 통하지 않았다. 무림의 하수가 무공비급을 얻어도 원래 간직한 내공이 없으면 절세고수가 될 리 없다.
그래서 고민해 보았다. 부족한 것을 쇼핑으로 채우는 것보다는, 놓쳤거나 잊고 있었던 것들을 찾는 게 더 쉬운 것이다. 원래 그렇다. 무엇을 채울까 하는 걱정은 쓸 데 없지만, 어디에 두었을까 하는 고민은 해 볼만하다.
결론은 이렇다. 인간이니까. 만날 놓치고 잊고 붙잡고 찾는 일들이 반복된다. 이래야 인간적인 인간(人間)이다. 물론 사소한 문제도 있긴 하다.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창피한 인용이지만 내가 앞에 쓴 시의 첫 구절처럼 예상치 못한 내리막에 떨어질 때 그냥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할 만큼은 해야 한다. 오르막도 올라야 하니까.

“이래야 내리막이다
모두 다 할 만큼 하는 세상이다
떨어질 때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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