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21:53 (금)
숙제 검사와 품격
숙제 검사와 품격
  • 홍기확
  • 승인 2013.07.23 14:44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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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9>

세상은 가끔 나에게 숙제를 내 준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고 초음파 사진을 찍어왔다.
얼핏 손가락마디 만할 듯한 녀석.
손, 발, 얼굴의 눈, 코, 입.
지구인의 그럴듯한 요소는 다 갖추었다.
그 사진을 보고 덜컥 걱정이 생겨났다.
이십대가 하는 그 흔한 막연한 미래.
그 걱정과는 사뭇 달랐다.
첫 번째 숙제.
“나 말고 누군가의 미래를 걱정하라.”

아이가 태어났다.
제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빠가 직접 안아보라는 의사의 종용에 손사래를 쳤다.
깨끗이 씻긴 아이를 신생아실의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았다.
아이의 영롱한 눈빛과 마주쳤다.
두 번째 숙제.
“앞으로는 세상의 어떠한 추위와 더위에도 견뎌라.”

아이가 자란다.
속세(俗世)에 던져진 아이는 좀체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
인류가 만든 유산을 서툴지만 모두 배워갈 것이다.
언젠가 세파에 휘둘려 깎이고 넘어지고 할 것이다.
아빠로서의 숙명은 주어졌다.
세 번째 숙제.
“아이가 세상과 마주할 때 품격 있게 서 있게 하라.”

방학숙제에도 품격이 있다.
숙제검사에도 품격이 있다.

부끄러우나 방학동안 한 숙제를 검사 맡는다.
누구에게 검사를 맡고 나서 혼날 걱정은 없다.
이제 앞으로 너에게 무슨 얘기를 할까?

다만 품격.

네가 태어난 지 이천백오십오일째 되는 오늘부터,
아빠가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앞으로 아빠는 가슴에 품어 놓은 독(毒)과,
심장에 숨겨 놓은 비수(匕首)를 꺼내어.
네가 감은 눈으로 사는 소시민(小市民)이 되지 않도록,
뜬 눈으로 체념어린 삶을 살지 않도록,
먹물만 뭍은 지성(知性)이 되지 않도록,
어떻게든 해 볼 것이다.

어미어비 없는 사람은 없다.
비록 부모님이 돌아가셨더라도 말을 가려 해야 한다.
어미어비가 있었던 사람은 없는 것이다.
우연처럼 운명처럼 부자(父子)의 인연을 맺었다는 것,
세상에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것,
우리가 부자라는 각인(刻印).

너와 평행으로 달리다 이제야 아빠가 너를 앞질렀다.
드디어 너에게 진정 남기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
너의 품격은 이제 아빠가 만들어 가마.

『옛날 옛적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았습니다.

아버지는 평범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평범한 삶속에서 비범하게 살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평범(平凡)했습니다.
아들은 비범(非凡)했습니다.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도 돌을 주웠습니다.
아들은 평온한 길은 재미없다며 그 길을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길마다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아들은 가지 않은 길을 걷겠다고 고집입니다.

주웠던 돌들은 소용없고 이정표는 녹이 납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돌을 줍고 이정표를 세웁니다.
새로 세운 이정표 옆에는,
아들의 아버지가 세운 이정표와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살포시 웃음이 납니다.
그랬구나….』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저 지루히 반복되지는 않는다.
이정표는 녹이 슨다.
하지만 누군가 녹슨 이정표를 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두운 산길을 걸을 때 전등을 자기 발에 비추지 않는다.
그러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반드시 자신의 앞 어디쯤을 비추어야 한다.
그래야 옆의, 뒤의 사람들도 그 불빛을 보고 갈 수 있다.

역사에도 품격이 있다.
이정표에도 품격이 있다.
사소한 전등 불빛도 품격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에도 품격이 있다.

세 번째 숙제.
“아이가 세상과 마주할 때 품격 있게 서 있게 하라.”

아빠는 간단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숙제검사를 마치고,
세 번째 숙제를 시작하려고 한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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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확 2013-07-25 16:59:41
제가 평범한 만큼 생각거리도 평범할 것입니다.
다만 주로 생각거리들은 평범한 것 같습니다.
걱정이라는 것도 크게 생각해 보면 일상의 평범한 것들이죠.
뭐...일기도 아니고 자서전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애매한 장르의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기확 2013-07-25 16:56:03
"할 일이 많은 것"과 "바쁜 것"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할 일이 많은 것은 언제든지 하면 되고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하면 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바쁜 것은 왠지 쫓기는 입장이 되어 그닥 어감이 좋지 않네요.
화두는 던져지고, 할 일은 많아지지만 느릿느릿 빠르게 살려고 합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훈훈한 감동 2013-07-25 09:26:40
생각거리를 만들어 주시는 글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숙제 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