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7:54 (수)
잊고 있었던 것들 찾기
잊고 있었던 것들 찾기
  • 홍기확
  • 승인 2013.06.20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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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7>

산책을 하다 땀이 나 벤치에 앉았는데 바람은 불다가 말다가 한다. 오랫동안 나를 붙잡아 두려는 자연의 계략이다. 땀은 좀체 식지 않는다. 결국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 아래에 누워 책을 읽는다.
새들도 공모한다. 말도 못하는 것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떠들어 댄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몇 종류의 새들이 우는지 세어보려고 노력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땀이 식었다. 한 숨 돌린다.
성격은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급속히 무뎌져 간다. 과거의 가치관이었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눈 한번 깜빡 안한다.”는 서슬 퍼런 가슴의 비수는 녹슨 지 오래다. 여행갈 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10분 단위로 계획을 짰던 완벽주의자는 영면(永眠)에 들었다.

기쿠다 마리코의 책 『눈 내리는 날』의 마지막 구절은 한때는 아이였던 어른들. 눈이 오면 신이 났던 아이에서, 이제는 출근길에 눈이 오면 한숨부터 쉬는 어른이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주는 여유 한 숨이다.

“무엇 하나 잃어버리지 않았구나.
잊고 있던 것들이 많이 있을 뿐이야.
어렸던 내 마음에 남겨둔 것은
지금도 틀림없이 내 안에 있다.”

어른이 되면 무조건 심각해지고, 냉정해지고, 포기해야 하고,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했다.
아빠가 되면 무조건 책임감 120% 충전에, 두 어깨에 스스로라도 짐을 실어 무게를 늘리고, 악으로 깡으로 많은 역할을 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나는 행복한 어른이 되지 못했고, 자연스레 아이는 행복한 아빠의 아이가 되지 못했다. 자꾸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것을 하는데 계속 손에서 놓치는 것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2년 동안 진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국엔 찾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 다시 책을 읽는다. 바람은 여전히 불다가 말다가 한다. 하지만 이제 땀은 식었다.
땀이 식는 30분 동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내 건너편의 벤치에 앉아 있다가 금세 자리를 떴다. 분명 그 정도의 시간은 땀이 식을 시간으론 부족하다.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은 쉬지도 않고 지나갔다. 가장 많이 들었던 그들의 대화, 아니 포효는 “어서 가자.”, “빨리 와.”, 두 가지였다. 관광객인 듯싶은 “어서빨리” 무리들은 여행 와서 쉬는 것도 이처럼 빨리 하려고 한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고 쫓는 그들을 보고 “여유 없는 방청객” 같다고 생각했다.

웃는 법을 까먹은 현대인들을 개그맨들이 억지로 웃겨주고, 놀러 가지 않는 도시인들을 위해 연예인들은 텔레비전에서 대신 놀아준다. 나는 TV를 안 본지 10년이 넘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 혼자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잃지 않았고, 연예인들이 대신 놀아줄 필요 없이 나 스스로 놀 수 있는 방법도 여럿 보유하고 있다.
현재 삶의 주관자는 자신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의 방청객에 불과한가?

벤치에 누워 책을 읽을 여유가 없거나,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지쳤을 때다. 무언가를 잊어 버렸을 때다.
여유를 부릴 때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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