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8 18:41 (목)
9번 타자라도 괜찮다
9번 타자라도 괜찮다
  • 홍기확
  • 승인 2013.06.12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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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6>

야구에서 타자들을 부를 때 1~2번은 상위타순, 혹은 밥상을 차린다는 의미로 테이블 세터진이라고 한다. 3~5번은 중심타순. 차린 밥상을 먹어치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6~9번은 하위타순이라고 하는데, 뭐 특별한 역할은 없다. 기껏해야 1~2번의 상위타순에 찬스를 제공하면 잘했다고 하는 정도다.
이 중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타자는 하위타순 중에서도 꼴찌인, 9번 타자다. 커다란 기대를 아무도 안하기 때문에 홈런을 치면 뜬금없이 쳤다고 해서 “뜬금포”라고 열광하고, 안타를 치면 선방했다고 좋아한다. 타율도 보통 다른 타자보다 낮다. 기껏해야 10번 중에 2번을 치는 2할 전후의 타율이다. 이런 9번 타자를 보며 세상의 몇 가지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9번 타자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한 사람이며, 커다란 성공은 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꾸준히 노력한다.
흔히 우리는 성공과 출세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둘은 의미가 엄연히 다르다. 벼락성공은 없지만 벼락출세라는 말은 있는 것처럼 성공은 반드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 노력은 보통 실패를 기반으로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반면 출세는 노력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출세한 명문가의 사람들이 의외의 좌절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실패 없는 노력을 했거나, 실패가 필요 없는 성공의 가도(假道) 내지는 가도(家道)를 달렸기 때문이다.

출세보다는 성공을 하고 싶다.
세상과의 타협을 빨리 했을지는 몰라도 분명 개개인의 출발점은 모두 다르다. 태어난 환경에서부터 자라온 환경까지, 도와주는 지원군마저 다르다.
출발점에서부터 나는 9번 타자다. 세상이 나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만큼 부담 없이 세상을 산책하고 소요(逍遙)하며 시간이 남으면 안타 몇 개를 날리곤 주변의 격려를 얻는다. 거창한 출세는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아기자기한 성공들을 해 나간다.

9번 타자는 다른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번트도 잘 대고, 찬스에서는 집중력을 발휘해 진루타를 치는 등 다재다능한 보통능력을 지니고 있다.
경영학, 자기계발서에서는 성공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강조한다. 주된 논리는, 다 잘 할 수는 없으니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강점을 선택해 집중 계발하라는 것이다.
바보 같게 나 역시 “선택과 집중” 전략을 몇 년 전까지 옹호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 곳에 집중했다. 하지만 재미는 없었다. 그저 달렸을 뿐이다. 물론 밥벌이할 만큼 일신의 내공(內攻)은 쌓였다. 하지만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았고 일신에 조공(朝貢)만 바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달리는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주변의 경치를 구경할 수 없다. 시력이 나빠서도 실력이 없어서도 아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순간이나 자기를 앞지르려는 차를 보기 위해 옆, 뒤를 보는 걸 제외하고는 앞만 보고 달리기 때문이다. 위협과 경쟁 이외에는 너무나 바쁘다.

나는 9번 타자다. 10번 중에 8번은 실패하고 2번만 성공하는 2할 타자다. 하지만 나는 프로야구에서 퇴출되거나 은퇴당할 리 없다. 나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 아마추어 아닌가? 삶의 멘토이니 정신적 지주이니 하는 사람들도 예외 없이 인생을 처음 살았고 살고 있다. 두 번 살면 잘 살 사람 많겠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처음 인생에서는 모두 초보자다. 도토리 키 재기다. 기껏해야 자기들끼리 키를 재봐서 큰 도토리, 작은 도토리라고 불릴 뿐이다.

9번 타자라도 괜찮다.
인생의 성공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갖고 있는 9번 타자라면 더 괜찮다.

1루, 2루, 3루에는 나의 가족, 친구, 친척들이 있고 타석에는 내가 서 있는 상상을 한다. 지금은 만루다. 내가 홈런을 치면 가족, 친구, 친척들이 기다리는 홈에서 환영을 받으며 들어오게 된다.

뜬금포를 치기 위한 연습을 한다.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세상을 한 바퀴 돌아오는 연습과 함께.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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