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0 10:04 (토)
키우는 훈련
키우는 훈련
  • 홍기확
  • 승인 2013.06.04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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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5>

내가 일하는 직장에는 곳곳에 화분이 많다. 꽃들과 나무를 키우고 살리는 건 보통 아줌마 직원들이다. 아줌마들은 비를 맞더라도 물을 흠뻑 줘야 한다며 비가 올 때에도 화분을 부산스럽게 옮겨 대곤 한다. 하루는 햇빛이 좋다며 화분들을 밖으로 열심히 옮기는 아줌마에게 물어봤다.

『귀찮게 뭣 하러 매번 옮기고 물주고 하세요? 저는 그런 거 성가셔서 잘 못하겠던데요. 우리 집에서도 집사람 혼자 화분에 물주고 가꾸고 다 해요.』

그러자 아줌마 왈,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화분이나 꽃 같은 게 점점 예뻐 보이고 집안은 화분으로 가득 차게 되요.』

아! 이게 바로 엄마들의 키우기 본능인가? 그래서 자녀들이 성장해 가며 언젠가 떠날 것을 느끼게 된 때부터 화분 같은 걸 키우는 것일까? 기가 막힌 모성본능, 다시 말하면 키우는 본능이다. 300만 년 전에 출현한 인류라는 존재는 진화를 거듭하며 여러 가지를 얻고 잃었지만, 소중한 몇 가지 본능들은 이토록 잘 간직하고 있다.

식물에게는 뇌가 없고, 특별한 몇 가지 식물을 제외하곤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할 수 있고, 키우는 데 애정과 정성을 쏟으면 더욱 더 힘차게 자란다는 것은 여러 실험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중 한 실험을 소개해 본다.
미국의 예일대학교 생물학과 교수진은 생물도 인간과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맥박이나 혈압, 진동의 변화로 감정의 극렬한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식물에 연결하였다.
A, B, C 세 교수는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정성스레 식물에게 물을 주고, D 교수는 물을 먹고 있는 식물들의 잎사귀를 실험실에 들어올 때마다 몇 개씩 태워버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네 그루의 식물들 모두는 D교수가 실험실에만 들어오면 격렬하게 탐지기의 눈금을 움직였다. 식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몸의 근육양이 평균적으로 적고 힘도 약하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겐 없는 무기가 있으니 키우는 본능이다. 키우는 본능은 때론 모성애로, 때론 억척스러움으로, 때로는 희생으로 표현된다. 어떻게 표현되든 종합선물세트격의 능력이다.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준 화분이 있다. 다 죽어가는 잎만 두 개 있던 화분이었는데 무려 1년 만에 새 잎이 돋았다. 아내는 물을 줄때마다 낯간지럽게, “맛있지? 물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라고 화분에게 말해준다. 새 잎이 돋은 화분은 삶의 의지를 잃었다가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로 1년이 지난 이제야 삶의 의미를 얻은 것 같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물론 남자에게 키우는 본능은 없다. 하지만 키우는 능력은 훈련으로 가능하고, 꾸준한 훈련은 습관으로 이어진다. 즉, “키우는 습관”은 얻을 수 있다. 본능과 습관은 거의 비슷한 거다.
내가 집에 들어오면 아직까지는 아이가 반겨준다. 하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인내와의 전쟁이다. 키우는 본능을 타고난 아내도 가끔은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다. 나는 훈련이 덜 됐는지 아내의 열 배 이상은 아이와 다툰다. 내가 화를 내거나 혼낼 때 식물에게 설치되었던 감지기가 아이의 몸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신용목 시인의 일화 중에서 시인의 선배가 해 주었다는 충고가 생각난다.

“순한 산에서 노루를 잡는 사냥꾼과 험한 산에서 노루를 잡는 사냥꾼 중 누가 노루를 더 많이 잡을까?
물론 순한 산에서 잡는 사냥꾼이 노루를 많이 잡겠지.
그렇지만 실력은 어떨까?
험한 산에서 잡는 사냥꾼이 훨씬 실력이 늘게 마련이다.”

아이가 천사였다면 나는 순한 산에서 배고픔의 결핍 없이 여가 삼아 사냥을 하는, 그저 그런 실력의 사냥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얼굴에 야수의 심장을 가진 아이이기에 나는 험한 산에서 생존을 위해 노루를 좇는, 꽤 쓸만한 사냥꾼이 되어가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아이에 대해 넉넉히 알게 될 즈음 나를 떠날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엄마의 “키우는 본능”은 대를 이어 갈 테지만, 아빠의 “키우는 훈련”은 아이가 크면 필요 없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위안거리는 있다. 언젠가 내 아들도 키우는 훈련을 시작하게 되리라는 것. 그때에는 그간 내가 배웠던 사냥기술을 전수해 줄 테다. 선천적으로 부족했던 내가 아이와 성장하며 얻은 모든 것을 물려줄 테다.
그래서 이렇게 훈련일지를 기록으로 남긴다.
부디 나보다 더 나은 아빠가 되길.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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