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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쁜 태극기와 슬픈 태극기
[기고] 기쁜 태극기와 슬픈 태극기
  • 미디어제주
  • 승인 2013.05.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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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덕면 주민자치부서 고병훈

안덕면 주민자치부서 고병훈
국경일이나 추념일이라는 말이 나오면 실과 바늘처럼 같이 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태극기다. 태극기에 관한 남다른 애정이나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서 태극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몇 년 전 현충일에 있었던 아들과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이러했다.
현충일은 휴일이라 좋다고 느끼면서 늦잠을 자려는데 일찍부터 작은 아들이 태극기를 달자고 성화였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그때 당시 미취학인 아들은 자동차, 비행기를 좋아해서 집 안에 중고매매상이나 제3의 항공사를 차릴 지경에 이르렀던 기억이 있다. 여기에 더불어 태극기를 무척 좋아해서 곧잘 태극기를 그리기도 하고 망토처럼 두르기도 하였다. 종종 태극기를 걸어놓자고 졸라댈 때가 있었는데, 아무 때나 내거는 게 아니고 다음에 이러이러한 날에 걸자며 미뤄온 터였다. 그러다가 다가온 날이 현충일이었다.

아들의 소원대로 태극기를 내거는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아빠! 태극기를 왜 내려서 달아, 위로 올려서 달아줘!"
"오늘은 이렇게 내려서 다는 날이야."
"왜 내려서 달아? 빨리 위로 달아줘! 빨리이~."
"오늘은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서 태극기를 다는 날이라 이렇게 다는 거야."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태극기를 다는 것에 대한 의견차이로 꽤나 서럽게 울었다. 공휴일과 휴일이 겹치는지 아닌 지가 관심이었던 나에게 난데없이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 것이다. 아이에게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 상태로 달래고 달래서 겨우 울음을 그치긴 했는데, 못내 섭섭한 표정이다.
"그러면, 사람이 죽어서 슬픈 태극기를 다는 거야?"
"어, 맞다! 슬픈 태극기는 저렇게 다는 거야. 기쁜 날은 기쁜 태극기를 달고..."

일단락이 되고나서 조금 있다가 밖에 나가게 되었다.
"아빠! 저기 태극기는 슬픈 태극기 아닌데..."
조기가 아니라 평소대로 게양된 태극기를 보고 아들이 하는 말이다.
"어, 저건 아마 잘못 달았나보다. 원래 내려서 다는 게 맞아."
한두 곳이 그랬다면 그 정도에서 이해시키고 마무리 될 수 있었는데, 호텔이며, 가정집이며, 가게며 가는 곳마다 '기쁜 태극기'를 달아 놓은 곳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태극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그런 걸 놓칠 리가 없다.
"아빠! 또 기쁜 태극기다. 여긴 슬픈 태극기, 저긴 또 기쁜 태극기..."

집으로 돌아 온 후, 아침에 관철시키지 못한 태극기 게양형태에 대해 다시 항의가 시작되었다.
"다시 올려서 달아줘! 저 집도 기쁜 태극기 달았는데..."
"오늘은 슬픈 태극기 다는 날이니까 안 돼!"
태극기를 거둘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기쁜태극기’로 달아달라고 아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아파트 창문 밖으로 본 다른 동 건물에는 태극기를 단 곳이 절반이 안 되고, 그 태극기 중에 또 삼분의 일은 기쁜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몇 해 전 그 날은 어린 아들 때문에 태극기에 대해 여러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올해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우리 모두가 충혼묘지에 가서 나라를 위해 가신 분들을 추모하거나 유족을 위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 추념일에 태극기를 내다는 일이다. 슬픈 태극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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