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7:33 (금)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 홍기확
  • 승인 2013.05.28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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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4>

아버지는 평소 맨 정신에는 별로 말을 하시지 않는다. 하루 종일 한 번의 대화도 없을 때도 있다. 밥을 먹을 때도 무슨 말을 하면 마지못해 답변하는 정도다. 이 답변조차도 한정되어 있다. 보통 “몰라(알겠다는 뜻임).”, “시끄러(더 얘기해 보도록!)”, “개새끼(역시 내 아들이군)” 정도의 세 가지를 애용하신다. 하지만 술을 드시기 시작하면 말을 하는 양이 늘어간다. 수식화 하자면 “시간당 언어 분출 = 쓴물 섭취량2 ”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수식에도 한계가 있으니 소주 세 병 이상을 드시면 쉬지 않고 얘기를 하신다. 심지어 내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본인의 이야기를 한다.

또한 아버지의 말은 항상 서론이 길다. 게다가 본론, 결론이 없다.
서론이 긴 이유는 마음이 약해서이다. 자식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니 당연히 시적인 은유와 비유, 활유와 묘사가 난무하고, 소설적인 복선들이 마구잡이로 깔린다.
본론으로는 절대 들어서는 법이 없다. 서론에서 말한 것들 중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유추해야 한다.
결국 결론도 내가 지어야 했다. 어렸을 적 10분~1시간 동안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아버지의 서론을 듣다가 지루해 못 참으면 벌컥 물어보았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해줘!”

그러면 아버지의 저주가 시작된다. 다시 한번 나의 복선들과 수사(修辭)기법들에서 추측해보라는 듯이 서론을 친절하게 반복해 주신다. 한편으로는 친절에 고맙고, 한편으로는 과도한 친절에 고통스럽다.

아버지에게 지난 주말에 전화가 걸려왔다. 한낮에 술이 거나하게 취하셔서는 두서는 없지만, 사뭇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핵심을 간추려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와의 전화통화는 항상 통화 내내 정신없지만, 통화가 끝나면 정신을 차리게 해준다.

그 중 대화의 두 토막은 거친 인생을 살다가 이제야 뒤돌아볼 시간을 갖게 된 남자이자, 남편, 아버지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에 집을 짓는다. 가지를 쌓아 집을 짓기 어려울 텐데도 집요한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이렇게 지은 집은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일생을 새들의 집짓기에 비유하자면 집을 완성한 시점은 50~60대쯤이 될 터이다. 완성이 아닌 미완성이라 하더라도 이 시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최적기이다. 힘껏 달려온 삶은 자식들이 점차 떠나게 되면서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을 얻고 직장이란 레이스에서도 끝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이제 딱 59세이시다.

소설가 김훈은 말한다.

“오르막에서 지친 몸이 내리막의 바람 속에서 다시 살아나 또 다른 오르막을 오른다.”

아버지의 이야기 방법을 따라 서론만 늘어놓아 보았다. 이른바 변죽 올리기다. 하지만 이제 본론을 얘기하고 결론을 맺을 때이다.

“엄마가 다리 인대 늘어났는데 귀찮다고 깁스 자기대로 풀고 놀러나가 버렸다. 다리 다쳐서 집나간 똥개 묶어 논 줄 알았더니 또 도망갔다. 나는 만날 돈만 벌고 엄마는 돈만 써.”
역시 비유의 달인이다. 어떻게 만취상태에서 똥개를 생각해 냈을까?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다.

“철물점에서 개줄 하나 사와서 묶으면 되지. 이번에는 다리 말고 목에다 거는 걸로.”
그러자 아버지의 짧은 답변.

“엄마는 젊었을 때 고생 많이 했잖니.”

오랜만에 듣는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우회적인 사랑 고백이다. 그간 고생했으니 충분히 놀러 다니게 해야 한다는 돌려차기 식의 사랑 한방이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계속 한다.

“엄마는 인대 늘어나서 밖에 놀러 못나가니까 그런지 요새 계속 나한테 짜증이다. 답답한가봐. 근데 내가 엄청 꾹 참고 있다니까!
그리고 요즘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나이 들수록 점점 나아진다고 한다. 물론 예전에도 내가 술을 좀 좋아해서 그렇지 다른 건 다 괜찮지 않았냐?”

보지 않아도 득의만만한 웃음을 때고 했을 이 말에서 느꼈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지친 아버지의 몸과 인생이 내리막의 바람을 만났나 보다. 젊었을 때 집을 지어가며 만난 거친 바람은 지금 내리막의 상쾌한 바람과는 사뭇 다르다. 이제 아버지는 두 번째 오르막을 오를 풍력(風力)을 얻은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서 튼튼하게 지어진 집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의 말에서 바람이 분다.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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