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오뚝이
  • 홍기확
  • 승인 2013.05.09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평범한 아빠의 특별한 감동] <23>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화장실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집니다.』

이 글은 2년 전에 본 다음부터 좀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글귀다. 인터넷에서 위 글의 출처, 즉 원문을 찾으려고 30분 이상을 검색했는데 도저히 원저자가 누구인지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이 작아진다니,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가 작아지다니, 아내는 뭐 남편의 번뇌를 해결하는 부속물인가? 2년이 지난 지금 잊지 않고 원 저자를 찾으려고 했던 것도 이 글을 쓴 작자의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였다. 찾은 후 내가 초등생이었다면 용솟음치는 양기(陽氣)로 작자의 글에 악성 댓글을 사만오천개 정도는 남겼을 터이다.

왜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소망은 작아져야 하는가?
아내의 소망은 어쩌고?
왜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번뇌는 작아지고 마는가?
아내의 번뇌는 걱정되지 않는가?

지금. 다시. 꿈을 얘기해 본다. 아내의 꿈은 무엇인가? 남편들은 알고 있는가? 모른다면 다시 묻는다. 아내의 꿈은 무엇이었던가? 남편들은 알고 있었는가? 그럼 다시 묻는다. 남편의 꿈은 무엇인가? 승진? 권력? 돈? 인격완성? 과연, 남편의 수많은 꿈들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한 꿈인가?

앞의 원문을 살짝 바꾸어본다.

『남편의 꿈이 클수록 아내의 꿈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꿈은 사라져 갑니다.』

우리나라의 여러 여건상 남편은 “부부(夫婦)”가 될 수는 있어도 “주부(主婦)”가 될 수는 없다. 집안일을 함에 있어서도 남편들이 아무리 주도를 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아내보다는 능력치나 세심한 측면들이 훨씬 떨어진다. 이 와중에 남편이 꿈을 점점 키워간다면 집안 내부의 일들에 소홀해지고, 자연스레 그 몫을 떠안은 아내의 꿈은, 소망은 점점 작아져만 간다.
게다가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 여자는 육아, 집안일 이외에 경제활동도 한다. 멋진 커리어 우먼이 대체로 화려한 싱글이라는 점은 산업사회에서 남편이란 존재가 과연 필수품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우리의 아내들은 너무나 바빠 꿈을 잃어가고 있다. 첫 번째 원흉(元兇)은 바로 남편이다. 아내의 시간을 뺏고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바쁘게 만드는 남편이다. 가족은 기대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내가 꿈을 점점 키우고 이룰 때마다 아내는 응원해 주었다. 관객이 되어 박수를 쳐주며 호응을 해 주었다.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아내의 꿈은 내 꿈이 커질수록 점점 작아졌다.
아내가 요즘 기운도 없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며 자꾸 피곤하다고만 한다. 아내. “내 삶의 관객(觀客)”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지금 아내의 꿈을 들여다보니 옷의, 단추의, 단추 구멍보다 작아진 듯싶다.

어제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했다. 아내는 내가 설거지를 할 때마다 미안해한다. 그 시간에 쉬라고 한다. 나는 집안일을 하면 할수록 집안일에 기여했다는 만족감이 점점 커지지만, 반면 아내는 미안한 감정이 점점 쌓여가나 보다. 집안일은 아내의 몫이라는 한국 사회의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탓이다.
세탁기에 가득 놓인 빨래를 돌려서 널었다. 아내는 지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집안일을 열심히 해도 나는 항상 보조다. 하지만 보조라도 해야 한다. 주된 바퀴가 잘 굴러가려면 보조 바퀴도 어쨌든 힘을 써야 한다. 주된 바퀴가 펑크 나면 보조 바퀴를 끼워서라도 굴려야 한다.

오뚝이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앞이든 뒤든, 심지어 던지더라도 발딱 일어나서 자리를 잡는다. 비록 흔들거리더라도.
오뚝이가 고장 난 것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서 있다. 오뚝이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원칙이 있다.
아내와 남편. 가정과 일. 모두 오뚝이와 같다. 무게의 중심인 추(錘)는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항상 세상이 흔들고 내가 흔들고 네가 흔든다.
지금 우리 부부가 만든 오뚝이는 내 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다. 내가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아내가 내 쪽으로 밀어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힘이 드는 일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과연 아내, 그리고 가족에게 공평하고 정당한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겠다. 하지만 설문조사에서처럼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아내의 꿈은 무엇입니까?』
 

 

<프로필>
2004~2005 : (주)빙그레 근무
2006~2007 : 경기도 파주시 근무
2008~2009 : 경기도 고양시 근무
2010 : 국방부 근무
2010년 8월 : 제주도 정착
2010~현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근무
                 수필가(현대문예 등단, 2013년)
                 현 현대문예 제주작가회 사무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